베/호국용사

kimswed 2014.07.01 09:20 조회 수 : 802 추천: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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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가 반만년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민족의 역사는 무려 3천여 번이나 넘는 외국의 침략을 받으며 수난의 시간을 견뎌왔다. 기원전을 제외한다면 매년 한 번 이상 외국의 침략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끈질긴 한민족의 저력은 최근 60년 동안 고구려 이후 최고의 기상을 높이며 이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를 세계 10대 무역 대국에 7대 강대국(인구 5천 명 이상에 국민 소득 2만 불이상의 나라)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9대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요즘 우리는 경이로운 눈으로 한국인의 역동적인 약진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을 즐기며 민족의 자부심을 한껏 느끼고 있겠지만 그런 자부심으로 턱을 치켜 올리기 전에 과연 우리나라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쳤는
지 돌아본 시간이 있었는가 묻고 싶다. 매년 돌아오는 호국 보훈의 달이지만 우리는 너무 의례적이고 관성적으로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 지에서는 나라를 지킨이들의 공로를 기리고 감사하자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베트남 교민들중에서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과 국가의 위기 상황에 민간인으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신 분들의 증언을 통해 애국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새겨보고자 한다. 대담 _ 한영민

이번 특별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국가에서 인정한 유공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교민 사회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을 찾아 인터뷰 요청을 드렸다.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다섯 분이 인터뷰를 위해 본사를 내방하셨다. 현재 베트남 교민 중에서는 약 70여명의 국가 유공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명단은 확실하게 확보되지 않고 있다. 고엽제 피해자 전우회의 조의권 지회장이 현재 40여 명의 유공자의 명단을 확보하여 국가 유공자 모임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더 많은 분들에게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국가 유공자 여러분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인터뷰에 응하여 주신 다섯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번 인터뷰는 근세들에 한국의 가장 유급한 상황이던 한국 전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안보와는 별개로 참여한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그 의미와 결과를 짚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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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한국 전쟁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대한민국의 인명 손실은 국군 전사자 14만 7천여 명, 부상 70만 9천여 명, 실종 13만 1천여 명으로 군인 관련 인명 손실이 도합 98만7천여 명에 이르고, 민간인의 피해는 피학살자 12만 8936명, 사망자 24만 8936명, 부상 22만 9625명, 피랍자 8만 4532명, 행방불명 33만 312명, 의용군 강제징집자 40만여 명, 경찰관 손실 1만 6816명 등 140여만명에 이른다.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합산하면 230여만 명에 달한다. 북한군의 피해는 군인 52만 명이 사망하고 40만 6천여 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 손실은 200여만 명으로 모두 292만여 명에 이른다.

한편 이 전쟁에 참여한 유엔군의 손실은 전사 3만 5천여 명, 부상 11만 5천여 명, 실종 1천 5백여 명 등 약 15만여 명에 달한다. 그리고 전쟁 중에 참여한 중국군의 인적 손실은 전사 18만 4128명, 부상 71만 5872명, 실종 2만 1836명 합계 92만 183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조: 북한 30년사) 또한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1천여 만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당시 남북한을 합친 우리나라 인구는 2천여만 명 정도였는데 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530여만 명 에 이르니 당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다 .

특히 비전투 요원의 인적 손실은 전쟁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이런 전쟁의 비참한 상황은 당시 유엔군 초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1951년 미의회 증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의회 청문회에서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과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때 구토를하고 말았다”라고 증언했다. 이런 비참하고 비극적인 전쟁을 거친지 고작 6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전쟁의 종식이 의미하는 종전 협정도 없이 그저 잠시 쉬자라고 합의한 휴전 협정이라는 불안한 상황 위에서 여전히 수시로 서로에게 총질을 가하는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당시 청년으로 전쟁에 참여하셨던 분들이 이제 전부 80세를 넘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이산가족의 아픔과 전쟁으로 인한 부상과 트라우마 등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며 생을 넘기고 있다.

이 비참한 전쟁에 참여했던 자랑스럽고 존경받아야 마땅한 우리의 영웅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며 나라와 안보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새롭게 애국의 마음을 다져보기를 기대한다.

애국이란 국가 유공자들과 군인들을 존중해주는 마음이다

손덕균 옹

10-1

재 푸미흥에서 상차이 사이공이라는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아들을 따라 베트남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신다는 손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48년 5월 10일)되는 해, 육사 6기로 졸업하여 장교로 입관한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 멤버의 한 분이다 .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워 충무 무공훈장과 화랑 무공훈장 2개 그리고 국가를 보위하는 일에 공헌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아 보국 훈장 광복장을 국가로부터 수여 받은 대한민국의 영웅이다. 슬하의 모든 자녀를 군인으로 복무, 일선에서 근무하게 하여 국가로부터 병역 명문가로 지정된 가문이기도 하다. 1950년 시흥 보병학교에서 대위로 근무하고 있다가 6.25 전쟁을 맞아 전라도 지방에서 학도지원군을 모집 훈련시켜 대구 전선에서 전투에 임하였다.연천 전투, 포항 탈환 전투에서 다리 관통상으로 3개월 입원 치료하고 퇴원한 후, 다시 재배치를 자청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단장으로 있던 강릉 9사단에 배치되어 북한군 귀순 병력으로 유격대를 만들어 지휘하는 것으로, 다시 일선 대대장으로 나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천 전투에서는 아군 1개 군단이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상황에서 손옹의 대대가 철수하는 아군을 방어하기 위해 3일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하며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공적을 세웠다. 그 전투로 인해 1개 군단의 아군은 무사히 철수하였으나 손옹의 대대 800여 명의 병력이 100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한국 전쟁사에서도 가장 비참한 전투였다 .

그 외에 기마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여 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50여 일 동안 사투를 벌여 백마고지를 사수하고 1970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한일은행에서 근무하며 전시 금융관리를 위한 법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손옹은 평생을 국가를 위해 바쳤다. 비록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아직도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는 너무나 떳떳한 생을 보냈다고 자부한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전쟁 중에 많은 부하들을 잃고 비록 적군이긴 하지만 많은 인명을 해쳤다는 자책감은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은 일이라며 목소리를 낮춘다.

젊은 시절 그저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국토를 방위하는 군인으로서 목숨을 국가의 이름에 걸고 한 치의 양보 없이 살아왔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이 그런 전쟁의 참상조차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며 아직도 전쟁의 상대인 주적을 찬양하는 행태가 보이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보다는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며 한숨을 내쉰다. 이제 그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생존한 인원이 고작 2년 전에 20여만 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 워낙 고령이다 보니 한 해에 약 5만여명씩 사망한다. 이제는 고작 10만여 명이 남아있을 뿐인데 이들에게 주어지는 나라의 보상금은 한 달에 고작 8만 원(지방자치정부지급분)이다. 전쟁 중에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군에 들어가 전투에 임하였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그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온 이들을, 지금처럼 살만한 형편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손옹은 참전 용사에 대한 대우가 부족함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조차 나라를 위해 바치는 유공자나 군인들에 대한 국민적인 인식이 너무 부족한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수렁에서 건진 우리의 선열들과 우방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잊지말자

차상덕 옹

10-2

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나라를 지키는 일원으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1949년 사병으로 군에 입대한 후 다음 해 전쟁을 맞았다 .
공병 병과로 직접적인 전투 참여가 흔치 않은 경우이나 경북 의성군 구성동에 있는 515 고지 전투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벌여 혁혁한 공적을 세워 당시 미국 대통령인 투르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훈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전쟁 중의 무공을 인정받아 화랑 무공훈장, 호국 영웅기장 그리고 중동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렵게 지내는 우리나라의 근로자에게 나라를 대신하여 일자리 창출을 만들어 낸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군 복무 중 외출 나와서 극장에 있던 중 6.25를 맞이한 차 옹은 6.25 전쟁의 의미가 주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을 언급한다 .
사실 당시 일반 사병이나 국민들은 사상대립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난다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가 위급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당시 문맹률이 70%에 달할 정도로 무지한 국민들이지만 모든 이들이 단지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으로 총알받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차옹은 특히 경상북도 의성군 515고지에서 피아는 구분할 수 없는 야간에 백병전을 벌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에서 살아남은 진정한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야밤을 틈타 아군의 진지 앞까지 들어온 적군과 몸과 몸, 총과 총, 칼과 칼이 서로 맞서는 육박전으로 인민군을 물리치고 고지를 지킨 수훈을 세웠다. 비록 전장이긴 하지만 전투가 끝난 아침 사방에 즐비한 시체들과 그 시체들 속에 까까머리 인민군들이 군화도 없이 짚으로 대강 감아놓은 신을 신고 널브러진 모습에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하며 다시는 비극적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안보정신을 재무장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한국 전쟁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국의 지원이다. 미국의 지원과 유엔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두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이 과연 철저히 준비하고 내려 온 북한군을 막을수 있었겠는가?
미국의 투르만 대통령의 지원 결정이 없었거나 혹은 의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절차를 밟노라고 한 달여만 더 늦었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 인민 공화국이 한반도를 다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예의국에서 왜 미국에만은 그렇게 은혜를 모르는 듯 행동하는가?
미국이 한국전에 참여하여 사망한 3만 6천 명과 9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그 가족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한국 사람을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 우리를 대신하여 대한민국을 구해준 사람들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과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친 외국 젊은이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 전 종식 당시 민간대사 역할을 수행

이순흥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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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세의 연세에도 교민사회 거의 모든 행사에서 얼굴을 뵐 수 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지니신 분이다.
이 옹의 이력은 실로 대단하다.
한인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고 현재 노인회의 전신 원로회장도 4년이나 역임하고 모든 교민사회 행사에 아낌없는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분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아 보국훈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통일장을 받은 것은 베트남전 종식 당시 미처 탈출하지 못한 교민들과 공관원들을 보호하여 5년여에 걸쳐 모든 교민들과 공관원을 안전하게 철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은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 정부는 파병을 댓가로 미군을 상대로 한국사람들이 사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가능한 많은 민간인들을 보내 외화벌이에 나섰다. 이순흥옹 역시 그런 경우로 베트남에 들어 왔다가 종전 시, 철수 시기를 놓쳐 체류하면서 이국에서 생긴 나라의 공백을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적절히 채운 것이다.
비록 민간인의 신분으로 남아있었지만, 어느 외교관 못지않은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저는 이 일로 말미암아 가정의 불상사까지 야기했지만 당시 제가 맡아서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그 일이 저에게 맡겨진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대한 봉사 기회를 가졌다는 면에서서 말입니다. 국가를 보위하는 일에는 민간인이나 군인이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민의 일원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동포애를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이가 들어 어떨지 모르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언제라도 나라가 다시 내 역할을 필요로 한다면 망설임 없이 내 한 몸 던진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

평상시에는 국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지만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는 국민모두가 한마음으로 나라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뭉쳐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음 속으로 다져야 할 애국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며 재삼 강조한다.

이순흥옹은 비록 현역 군 경력은 없으나 민간인으로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이들이 망설이는 위험한 일을 자청하여 나서 당시 위험에 처해 공포의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조국이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의 베트남 전 참전은 당시 우리나라 입장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근거

유창근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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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74세가 되는 연세로는 보이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계신 분으로 교민사회에서 노인회의 일원으로 한인회장 선거 선관위원장을 담당하는 등 묵묵히 많은 봉사를 하시는 분이지만 항상 겸손한 자세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시는 분이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헌병 하사로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주월 범죄 수사대에 근무하여 공훈을 세워 나라로부터 인헌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의 증언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나라의 당시 형편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일이다. 미군의 지원으로 나라를 간신히 유지하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참전은 했지만, 우리 지휘관들이 항상 입에 달고 하는 말은 절대로 목숨을 함부로 내던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나라를 지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항상 반복하고 있었다 . 바로 이런 자세가 베트남전에 참여한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당시 파병된 우리 군인들의 봉급이 사병의 경우 180불이었는데 정작 장병들 손에 쥐어진 것은 45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35불은 전부 국가로 귀속되었는데 전체 파병인원이 5년 동안 연 인원 30만여 명이었는데 이 돈을 환산하면 약 5억불에 가까운 돈이다. 이 돈이 바로 우리의 차선책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나라의 경제개발을 위해 사용되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은 당시 남의 나라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왜 군인들이 한국에서는 존경은 커녕 가진 것이 없어서, 혹은 든든한 뒷배경이 없어서 군복을 입어야 하는 부족한 인간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우리 집안의 경우는 모친 쪽이 좌익이고 부친 집안이 우익으로 갈라져서 같은 집안에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서로 갈등을 유발하는 안타까운 가족사를 겪었다.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에 있는데 어떻게 정치 사상으로 인해 가족끼리 적대시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서로 함께 지내지도 못하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는지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불행한 집안사가 개인의 일만은 아니고 수많은 가족들이 이런 불행을 겪었는데 요즘 사람들이 너무 안일한 생각으로 우리의 주적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너무 상대를 모르고 살며 사회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그런 면에서 어린 학생들의 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 일부 편향된 교사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 준다면 또 다른 불행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좀 냉철한 사고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고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응하는 자, 그들이 바로 애국자

조의권 옹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베트남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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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옹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연세지만 국가 유공자라는 면에서 옹이라는 호칭을 같이 사용하였다. 71년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1년간 복무했다. 그 결과 고엽제에 인한 피해가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전쟁 중 상해 받은 자로서 국가 유공자 및 상해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베트남 지회장으로 7년 동안 봉사하고 있다. 조의권 옹은 국가 유공자의 처우에 대한 국가법안 사본을 보여주며 교민사회에서의 행사에서 공적 단체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못 받는 현실에 대하여 울분을 털어놓는다. 지난번 대통령 방문 자리에서도 사적 단체들보다 더 허술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법률에 위반되는 경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가 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조 2항의 의전상의 예우에 보면 “정부, 지방 자치단체, 그밖에 공공단체 및 각급 학교 등의 국경일. 기념일 등에 중요한 행사를 할 경우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국민 의례로 하여야 하고 초청된 국가 유공자에게 그 희생과 공헌에 상응하는 의전상의 예우를 하여야 한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는데 과연 전부 국가 유공자로 구성된 고엽제 전우회에 대한 예우가 적합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고엽제 전우회는 베트남 중앙 정부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NGO 단체로써 베트남 정부마저 예우를 해주는데 왜 대한민국의 공관들은 마치 피해자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하며 마지못해 자리를 양보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주는가? 우리는 상해자의 모임이 아니라 국가 유공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주시기 바란다. 저희만을 고려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유지, 발전하는 동안 수많은 애국자들이 흘린피와 땀이 있었고, 국가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그들을 국가 유공자로 지정하여 예우하는 이유는 국가유공자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아야만 우리 후손들도 나라가 위급할 때 팔을 걷고 나서게 되지 않느냐는 얘기다.

왜 이들은 남의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여 평생을 상해자로 우울한 생을 보내야 하는가? 오로지 국가의 부름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은 이국의 땅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국가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응하는 자 그들이 바로 애국자가 아니던가? 당연히 그리고 마땅히 그들은 모든 국민들의 존경과 합당한 예우를 받아야 함에 누가 이의를 제의하는가?

6월 영웅 국가 유공자들과 만난 뒤

이상 다섯 분의 국가 유공자를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이 분들이 겪은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가 직접 겪은 일인데 그 고통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렇게 남의 일처럼 느껴질 만큼 우리의 애국에 대한 사고가 공정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그들의 신세를 외면하는 일이나 군인들의 목숨으로 국토를 방어하고도 군인을 하대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다음에 또다시 이런 상황이 닥칠 때 누가 우리를 위해 팔을 걷을 것이며 또, 누가 나라를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나설 것인지 정말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을 보면 다 눈길을 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주는 눈길은 존경과 감사함이 담겨있지만, 한국에서 군인에게 주는 눈길에는 믿음 없는 불안과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이에 대한 동정심이 담겨 있는 것이 다르다. 군복무가 세월을 죽이며 썩는 시간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임무를 수행하는 귀한 시간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인식을 공감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사회정신 개조 및 정상화 수립 계획이라도 마련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는 국민의 안녕을 보장한다면 국가는 국민들에게 그 댓가로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니겠는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애국심을 국가 유공자들의 애국적 행동에 진정한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일깨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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