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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상담 김규성
취급분야 금융업무

호찌민 시의 노른자, 1군 (District 1)

호찌민 시는 1 ~ 12군, Bình Tân, Tân Bình, Phú Nhuận, Tân Phú, Gò Vấp, Thủ Đức 등 총 18군 (quận)과 Bình Chánh, Cần Giờ, Củ Chi, Hóc Môn, Nhà Bè 등 다섯 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1군이야말로 명실상부한 호찌민 시의 중심가이자 경제, 사회, 문화의 핵심요지다.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각종 재정, 통상, 금융, 행정기관들과 한국, 프랑스, 미국 중국 등 다수의 영사관이 상주해 있으며 이 외에도 동커이, 하이바쯩 거리 주변으로 5성급 호텔과 고급 식당, 쇼핑센터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그밖에 1군은 프랑스 식민통치시절 프랑스식 건축양식으로 설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는 득바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중앙우체국, 인민위원회청사, 팜응우라오 거리 (여행자 거리), 전 베트남 대통령 관저였던 통일궁 등이 있어 지금도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리학상 호찌민 시 한 가운데 위치한 1군은 다시 벤응에 (Bến Nghé), 벤탄 (Bến Thành), 다카오 (Đa Kao) 등 10개의 소 행정구역 (총면적 7.71 sq.km, 상주 인구22만 7,569명, 인구밀도 29,547명/sq.km)으로 나뉘며, 1군 주변으로는 사이공 강과 2군 (동), 3군과 10군 (서), 4군과 5군 (남),빈탄군과 푸뉴언 군 (북) 등이 에워 싸고 있다.

호찌민 시 (1군)의 역사
하구 삼각주에 자리하고 있는 베트남 최대의 경제도시 호찌민 시의 본래 이름은 사이공( Sài Gòn, 柴棍,西貢)으로 프랑스 신민지인 코친차이나와 그 후의 독립국인 남베트남의 수도로, 1975념 에 호찌민 시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시 중심부인 1군은 사이공강둑에 놓여있고, 동해로부터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a. 초기 시절:
원래 습지대였던 이곳은 베트남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곳에 수 세기 동안‘프레이 노코르’라는 크메르 인들의 어촌 마을로 시작했다. 이후 경 국왕 체타2세는 내전을 피해 찾아온 베트남 난민들에게 ‘프레이 노코르’ 지역에 정착하도록 허용하였고, 바로 이 무렵부터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이후 캄보디아 왕국이 태국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짐에 따라 서서히 베트남화 되어 가기 시작한다.

b. 윙 (Nguyễn) 家통치 시절
앞에서 잠시 본 대로 원래 이 지역은 크메르 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 부족들이 거주해 왔는데 1623년 윙 家가 조세정책을 펼치면서부터 베트남인 (Viet족 또는 Kinh족)들이 사이공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1698년경 윙 (Nguyễn) 가의 통치자들은 메콩델타 지대를 점령하고 행정구역으로 편입하여 관할하기 시작했으며 1698년에는 탁월한 행정가인 윙후깐 옹 (Nguyễn Hữu Cảnh AD. 1650~1700년; 사이공을 개척한 일등공신, 당시 남부전체 관할)이 파견된 뒤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c. 프랑스 식민시절
1859년경 프랑스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 이 도시에는 식민통치 기간 동안 많은 전통 서양식 건축 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사이공이 "동아시아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1859년 2월 9일,프랑스 군대가 사이공 부두에 도착한 이후에는 사이공이 베트남인에 의해서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도시구획이 정리되어진다. 이때부터 프랑스인들은 20세기 후반기 30여년 동안 이 거리를 유럽 풍의 현대적 도시로 변모시켜 나갔다. 득바 성당 (1877년), 사이공 우체국 (1886), 오페라 하우스 (1900), 인민위원회 청사 (1898), 인민재판소 (1881), 혁명 박물관 (1885) 등이 건축된 시기도 바로 이 무렵이다.

프랑스인들의 사이공 개발과정
- 1884년; 사이공을 베트남의 수도로 정함
- 1862년; 사이공과 쩌렁 지역을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건설계획
- 1865년 2월; 파스터 등 1군 내 20여개의
   거리가를 프랑스식으로 명명
- 1870년; 1군 거리 가로수 식수
- 1908년; 배수로 시설
- 1909년; 가로등
- 1914년; 1군의 명물 벤탄 시장 축조
한편 프랑스가 비엣민 (Việt Minh)에게 져서 베트남으로부터 축출당할 무렵부터 구사이공과 베트남화교들이 주로 거주하던 쩌렁 시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어 수도 사이공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베트남이 베트남 민주공화국 (남)과 베트남 공화국 (북)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였음) 이후 인민군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호찌민 시로 개명된다.

거리 이름을 알면 베트남 역사가 보인다. 1군의 대표적인 거리 이름으로 역사를 돌아보자.
(베트남 거리 이름은 역대 왕이나, 애국자, 민족정신등으로 지어져 있다)

베트남중앙은행, 시중은행에 달러 매각 계획

달러화를 일일 기준환율보다 3% 이상 비싸게 판매하는 시중은행에 대한 단속 강화

베트남중앙은행(SBV)이 달러 부족을 겪고 있는 시중은행에 달러화 공급에 나설 계획이다.
이는 상당수 생산·판매업체들이 수입 대금 결제를 위해 시중은행으로부터 웃돈을 주고서도 달러화를 구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 이에 따라 달러화 공급 우선 대상 시중은행은 자기자본대비 외환보유 적자비율이 5% 이상으로, 해당은행은 SBV로부터 신용으로 달러화를 살 수 있다.
또한 시중은행으로부터 달러를 우선적으로 매입할 수 있는 업체는 해외로부터 원·부자재를 수입해 생산하는 업체로 지정됐다. 한편 SBV는 이와 함께 달러화를 일일 기준환율보다 3% 이상 비싸게 판매하는 시중은행에 대한 단속도 강화하기로 했다.
그 외에 SBV는 또 모든 금융기관에 외환 총 여·수신 현황을 파악해 오는 4일까지 외환관리국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베트남에 진출한 대다수 한국업체는 해외에서 반입한 원·부자재나 장비 대금 결재를 위해 신한비나, 우리은행, 외환은행 등 현지 진출 한국계 은행 지점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달러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신한비나 하노이지점 관계자도, “시중에 달러가 워낙 부족한 상황에서 연말 결재 시기까지 겹치면서 도움을 청하는 업체 수가 급증하고 있다. 10만달러 이상을 원하는 고객의 경우 사전에 예약을 받아 호찌민 본점까지 동원해 공급해주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 Created by: kimswed
  • Completed on: 4th Jan 200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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