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풍습 티벳의혼인문화

kimswed 2006.10.04 06:30 조회 수 : 2588 추천: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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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국가의 균형발전이라는 보편성 속에 해당민족에 국한되는 특수성을 포함한다. 특히 이러한 특수성에는 해당민족이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전통과 문화를 와해하고 분산하려는 목적이 의도되어 있다. 현재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 중 가장 그 분포와 체적이 광대하고 독립의 의지가 고조되어 있는 티벳은 점차 중국 정책의 의도 속에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파괴되면서 그 정체성과 전통문화의 말살 위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정책의 진행 과정 속에서 티벳의 정체성은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희석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로에서 티벳의 전통문화를 통한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현상을 주시하고 그 변화의 요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주요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티벳의 정체성과 전통의 지속적인 생명력이 중국의 개발정책과 가지는 상관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상의 목적을 토대로 티벳의 정체성과 저력을 혼인문화­특히 계층에 따른 혼인유형 분석과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의 전통을 통하여 고찰할 것이다.

혼인은 가정의 구성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으로 한 가정의 형태는 이에 상응하는 혼인의 유형을 수반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혼인문화는 인류의 주요한 문화현상이다. 인류의 초기는 모계사회이며, 모계사회의 특징을 혼인의 형식으로 국한하자면 일처다부 등의 군혼문화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혼인형태는 티벳에 지금까지 존재한다.1) 현재적으로 티벳에는 여전히 일부일처를 비롯하여 일부다처(대부분이 姐妹共夫의 형태)․일처다부(대부분이 兄弟共妻의 형태) 등의 다양한 결합형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의 형태를 제외한 군혼의 전통은 외부의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티벳 혼인문화의 전통적인 특징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결코 단순한 엽기 또는 야만을 토대로 형성된 문화현상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티벳에서 자생하여 계승된 문화의 일면임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평면적인 현상에 대한 고찰이 아닌, 이러한 혼인문화를 생산한 인문적 요소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혈연이나 경제적인 생산 단위가 여성을 중심으로 집약되는 모계사회로부터 변화하여 지배와 소유 중심의 완전한 부계사회가 정착한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이 가지는 합리성은 차치하더라도 모계사회의 잔재나 혼재는 이색적인 형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각은 지금까지 잔존하고 있는 모계사회의 편린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심 속에는 여전히 이를 선진에 역행하는 후진성으로 간주하는 편견이 동반되어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티벳의 군혼문화 특히 일처다부의 혼인형태에 대해 ‘분가와 독립에 따른 경제적 이익분할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하고 있으나2) 그 ‘경제이익’의 뚜렷한 토대와 배경에 관한 설명과 제시는 소략하거나 생략되어 있어, 구체적으로 그 실상을 파악하기에 적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티벳 전통의 혼인문화가 각 계층의 개인 상황을 염두하여 선택된 것으로 개별적인 형편에 따라 그 혼인의 유형 역시 다양하게 현상화되었음을 감안하여, 본고에서는 기존연구에서 우세하게 거론되었던 ‘역사적인 농노제 사회에 존재했던 토지 중심의 경제적 이익의 실체’를 중심으로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을 고찰할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혼인유형 속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군혼문화 유형(일처다부․일부다처)의 주요 토대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 요소를 토지와 관련한 계층구조에서 비롯한 경제적인 이익 증대에 국한하지 않고, 이러한 현상이 인문적인 환경과 관념에서 기인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티벳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을 분석할 것이다.

이와 같은 티벳 전통의 혼인문화 특히 현존하는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에 대한 고찰은 현재적으로 중국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과 마찰을 겪고 있는 티벳 문화의 정체성을 고찰하는 편린으로 작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티벳 전통의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긍정을 통해 그 내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Ⅱ.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에 대한 기존연구의 분석 배경은 경제적인 이익 추구로 이에 대한 본질은 봉건농노제(封建領主莊園農奴制度의 약칭, 이하 농노제)에서 출발한다. 티벳의 농노제는 약 10-12세기에 맹아를 보였으며, 투르판(吐蕃)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그 토대가 형성되어 각 지역에서 세력을 할거하였다.3) 13세기에 이르면서 蒙元의 중앙에서 티벳 지역에 13개의 萬戶府를 설립한 것이 농노제의 추형으로 중국의 정복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티벳의 농노제는 帕竹이라는 지방정권 때에 완성된 것이다. 농노제 속에서의 생산자료는 기본적으로 政府․領主․寺院이 점유하는 장원(莊園) 즉 토지이다. 또한 정부나 영주 집단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이러한 생활과 생산의 자료를 획득하여 여기에서 생산되는 차역과 세무를 담당하는 계층은 차파(車巴) 집단이다. 이외에도 퇴군(堆窘)과 낭생(囊生: 봉건농노제도 후기에 생산된 계층으로 이들 대부분은 파산한 차파와 퇴군으로 구성)은 기본적인 생산자료를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오직 노동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하층의 집단이다.         

1959년 이전 농노제 속에서의 티벳 사회계층은 크게 승려계층과 비승려계층으로 구분되며,4) 이 중 비승려계층은 귀족계층인 급이파(給爾巴: aristocratic lords)와 농노계층인 미새(米塞: serfs)로 구분된다. 이 두 계층의 신분은 모두 세습되고, 지주와 농노의 관계 역시 대등적 계승의 법칙에 의거하여 농노계층은 지주에게 귀속된다.5) 전체인구의 수치에 있어 300호의 급이파 가정을 제외하고 기타의 비승려인구는 모두 미새인 농노계층이었다.6) 또한 농노계층은 상층농노계층과 하층농노계층으로 대분되며, 이 중 하층농노계층은 다양한 조건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세분화된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계층들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혼인의 유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티벳 혼인유형의 기본형은 일부일처이며, 또한 모든 계층의 혼인에 대한 기본적 원칙은 계층내혼․등급내혼․혈친외혼이다.7) 특히 혈친외혼은 씨족외혼으로 티벳에서는 사촌과 이종 사이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이러한 기본 규칙을 위반했을 때에는 극형으로 처벌하였다.8)

이하의 내용은 티벳의 전통적인 혼인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배경에 해당한다. 1959년까지는 전면적으로 존재하였으며 중국의 티벳 장악 이후 적어도 그 여파가 10여년은 충분히 잔존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티벳 농노사회의 계층단위에 대한 기본인식이 없다면,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을 고찰하는데 있어 국한성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티벳 전통의 계층사회를 배경으로 이들의 혼인유형과 그 기본적인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농노제를 토대로 한 티벳의 전통사회는 엄격한 계층의 구분이 있었으며,9) 이에 따른 혼인의 형태도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이러한 혼인형태의 선택은 철저히 ‘개인 입장에 따른 유리한 고지 확보’를 위한 것이였다. 귀족계층과 농노계층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상황과 혼인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족계층의 혼인


티벳의 귀족계층은 봉건화 과정 속에서 계층에 따른 토지분봉으로 인한 재산의 차이를 형성하였다. 티벳 최초의 귀족은 대략 기원전 4세기에 藏王 네치짼뽀 시대에 출현했다고 한다. 티벳의 신화에 따르면 그가 인간 세계에 강림하여 투르판의 군왕이 되었고, 이 때부터 투르판에는 처음으로 君臣의 구분이 생겨 이후에 생긴 그의 후예들은 티벳의 신성한 가족으로 그들은 이미 선천적으로 귀족의 특징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송짼감뽀 시대에는 이미 ‘尙倫’․‘公倫’․‘齊倫’ 등의 다양한 특권을 향유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이 실제적으로 초기의 티벳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의 티벳 귀족계층은 17-18세기에 형성되었다.10) 당시 겔룩파가 중앙정부를 육성하면서 안정적인 政敎合一의 정권체계인 甘丹頗章이라는 지방정권을 건립하였고, 이는 관작의 수여를 통해 티벳 지방정부로 하여금 분봉을 받는 귀족이 300여년의 역사 속에 일종의 집단을 형성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변화에 따라서 티벳의 귀족계층 역시 흥쇠의 변화를 거듭하였고, 1959년 중국 정부의 티벳 장악 당시에는 이전에 분봉의 혜택을 받았던 400여개 가정의 귀족들 중 197개만이 남았다.11)

티벳 지방정부 귀족은 일반적으로 175명의 ‘孜仲(僧官)’과 175명의 ‘雪仲(俗官)’으로 구성된다. 이는 티벳의 귀족계층 중 상층승려와 세속관원이 평행하는 구성이다. 그러나 각지에는 格巴라 불리는 가정이 매우 많았는데 이는 급이파의 가정으로 예를 들어 後藏 班禪轄區 안의 귀족관원과 昌都․山南 등의 活佛․頭人 및 39族의 1,100戶 등이다. 이들은 그 지역에서 명백한 귀족으로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결코 완전한 자신의 고유세력을 형성하기는 부족한 계층이다. 단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는 달라이 라마 집단의 중심으로서 일정한 세력을 견지하는 소수로서의 진정한 특권계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 계층의 하위 귀족계층은 그 지방의 상위계층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귀족계층의 내부는 또 다른 계층으로 구분된다. 티벳에는 지방정부 속하는 귀족, 班禪拉章 소속의 귀족, 薩迦法王 소속의 귀족, 지방성을 지니는 소귀족 등 다양하게 분화되지만 그들이 비록 같은 계층에 소속된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의존성과 종속성이 매우 뚜렷하다. 특히 지방정부 소속의 귀족들은 官府의 대변인으로 지방정부의 권위를 옹호한다. 그러나 지방정부 소속의 귀족 내부에는 대단히 엄격한 등급의 구분이 있으며, 이러한 구별은 관리사회와 교류 및 복식 등에서 확연히 표시될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와 자녀교육 및 윤리관념 등에서도 그 차이가 현저하다.12)

티벳의 귀족계층은 서구의 귀족계층과는 구별되는데,13) 티벳 귀족의 고저구분은 ‘領地의 대소’와 ‘官爵을 통해 획득한 권력의 정도’이다.14) 이와 같은 요소를 근거로 하여 티벳의 귀족계층은 아계(亞谿)․제본(第本) 또는 제본미찰(第本米扎)․미찰(米扎)과 같이 대․중․소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15)

‘아계’는 ‘父輩의 장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00여년의 역사 속에 티벳에는 6개의 ‘아계가정’16)이 출현하였다. ‘아계가정’은 대량의 토지를 소유하며 최고의 권위와 세력을 향유하는 귀족계층이다.

‘제본’ 또는 ‘제본미찰’은 티벳에 5개의 가정이 있으며,17) ‘제본’ 가정 이외에 30개의 ‘미찰’ 귀족가정이 있다.18)

모든 ‘미찰가정’은 가족 구성원 중 ‘噶倫’이라는 지방정부의 주요 관원 직무를 담당하였거나 담당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가족은 일반귀족 가정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족의 호칭에도 구별을 두었다.19)

상술한 3가지 유형의 가정이 티벳의 농노제 사회의 귀족특권계층이다.20) 이 중 ‘아계가정’은 이러한 티벳 사회의 귀족계층을 유지하는 토대로써 혈통을 그다지 주요 요소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티벳의 귀족가정이 비록 가족의 혈통을 전혀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업계승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위해서 가족 내부에서는 굳이 혈친전승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았다. 단지 가족 내에 관료 출신의 남성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남성은 직접적으로 귀족가정의 발전과 쇠락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귀족계층의 가업전승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계층 사이의 성원 유입이 상당히 탄력적으로 운영되었다. 결국 귀족가정의 연속적인 생명력을 위하여 귀족가정에서는 이혼․재혼․데릴사위․양자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혼인과 가족의 구성을 허가하고 운용하였는데, 이는 귀족 가정 내부의 이익 보호를 위하여 사회가 인정하는 일반적인 현상이였다.21) 따라서 가정의 권력과 경제력을 구비하기 위해 이혼과 재혼은 물론 여러 배우자를 일시에 동반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가정 구성의 방식에 부합하여 ‘제본가정’에서는 일처다부의 혼인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티벳 귀족가정의 일반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귀족가정을 제외한 다음에 고찰할 농노가정에서 역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혼인형태이다. 이러한 혼인유형을 선택하는 원인은 각 계층마다 다양하지만 귀족가정에서는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실권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였다.        

‘미찰가정’ 역시 티벳의 대귀족 범주에 포함되지만 위에서 서술한 ‘아계가정’․‘제본가정’과는 다르다. 이러한 ‘미찰가족’의 주요한 구성조건이 사회권력과의 연계이기 만큼, 중국 정부의 흡수시기인 1940-1950년대에는 약 30여개가 있었다. 그 중 일부의 ‘미찰가정’은 기본적으로 당시 티벳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夏扎’․‘擦絨’ 등과 같은 가족이다. 특히 이와 같은 ‘미찰가정’ 역시 가족의 지속을 위하여 이혼․재혼․데릴사위․양자 등의 결합형태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가족의 연속과 가족 내의 남성계승자 유무에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남성계승자가 있다면 이 계승자의 직위 상승을 통해서 그 가족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이용하여 가족의 사회적 지위 또한 제고할 수 있었다.22) 결국 ‘미찰가정’의 혼인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토지의 보유정도가 티벳 귀족가정의 지위와 개인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족계층 사이에는 일부일처 이외에도 일부다처의 형식과 일처다부의 형식과 같은 혼인유형이 당시 공존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2. 농노계층의 혼인문화

     

농노계층인 ‘미새’는 티벳 전체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며,23) 상층농노인 ‘차파’와 하층농노인 ‘퇴군’․‘낭생’ 등으로 구분된다. 전자인 차파는 ‘納稅人’이며, 후자인 퇴군․낭생 등은 모두 ‘小戶人家’인데 이 중 주요 계층은 ‘퇴군’이다. 정치권력이나 실제세력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본다면 차파는 비교적 그 입지가 높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계층이다. 차파는 각각 가족의 명의로 협동화된 가정단위를 조직한다. 각각의 차파는 지주로부터 승인받아 상당한 경지의 면적을 관리한다. 또한 이러한 토지들은 계승방식에 따라 자손들에게 세습이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차파의 가정은 서면화된 토지계약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규정된 각 항의 의무 내용을 철처히 이행해야 하며, 규정 내용을 위반할 경우에는 지주에게 추방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차파는 그들이 계약한 토지에 구속되어 직접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계약한 토지를 이탈할 수 없다. 차파는 그들의 토지 또는 지주들에게 복무해야 할 의무가 매우 광범위한데, 여기에는 각종의 부세는 물론 다양한 人力 노역과 獸力 노역까지 포함된다. 어떤 것은 반드시 실물로 납세해야 하지만 어떤 것은 현금으로의 대체가 가능하다. 결국 차파들은 지주와의 계약을 통해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세습하고 계승하는 반면, 이에 상응하는 세무 책임 역시 엄중하였다.

하층인 퇴군은 차파와 같이 경지에 구속받은 퇴군(束縛堆窘)과 그렇지 않은 퇴군(米波堆窘)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극소한 면적의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으로 보유한 토지는 협동화된 가정단체의 소속이 아니라 법에 따른 단독 개인의 소속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규모의 租用 토지는 차파가 모두 합법적으로 세습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르며, 이러한 한계 때문에 미파퇴군은 일시적으로 토지를 보유할 경우에도 차파와 같은 다양한 부세와 노역은 없다. 단지 지주에게 인력 노역만을 제공하면 되는데 이러한 부역은 개인의 단독 소관으로 협동화된 가정의 단위와는 무관하다. 미파퇴군은 본인이 근로하게 되는 장원의 지주와 관계가 발생하여 그 지주에게 복무해야 하는 일정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본인이 본인의 행동을 제어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자율적으로 본인의 거처와 노동지점 및 지주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미파퇴군의 주요 생존방식은 차파의 토지를 차용하여 경작하는 것이다.24) 결국 미파퇴군은 전체인구의 수치에 있어 이들을 통한 정치적 역량이나 경제적 자원을 언급할 수 없다. 반면 차파의 계층은 대량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 대량의 토지는 이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부역을 감당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원이며, 또한 이 자원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기초는 퇴군의 노동력이다. 퇴군은 차파로부터 차용한 토지를 경작하며 일반적으로 이들은 노동력으로 세금을 대신하는데, 이와 같은 세금 납입방식은 납세자의 필요에 따라 노동 일수와 시간을 규정한다. 이는 속박퇴군과 미파퇴군이 같으며, 모든 퇴군은 단지 개인적인 신분으로 다양한 토지자원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여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진 가정단체의 성원으로서 토지를 사용할 수는 없는데, 이 때문에 각종의 자원을 모두 세습할 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두 농노계층의 유관현상 즉, 두 농노계층의 혼인유형과 가정구성이 상이한 특징을 통해 현재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혼인의 형태를 면밀히 파악할 것이다.         


1) 상층농노의 혼인문화

     

생산의 자료를 보유하며 세무․노역 등 납세와 부역의 의무를 가지는 상층 농노계층인 ‘車巴’는 ‘差巴’라고도 한다. 차파의 혼인과 가정제도는 ‘單一婚姻’을 원칙으로 하며, 이와 같은 단일혼인은 모든 차파의 가정에 규정되어 있다. 단지 ‘一代一次’의 혼인을 통해 결합한 혼인계약을 승인하여, 이러한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자녀만이 정식의 가정성원으로서 모든 법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혼인규범의 운용은 가정의 합작과 기득한 토지의 분할을 엄격히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기본적인 계승법례에 따라 가정 내부에 거주하는 남성들은 모두 토지에 대한 공동계승인으로 합작체제 속에서 보유한 토지를 분향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결국 상층농노인 차파는 동일세대에서 두 개의 부부가정(연합식의 가정)이 있게 되면, 이들 두 가정 사이에서 발생하게 될 치열한 이익충돌로 말미암아 가정단위의 상황이 견고하지 못할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부계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농노제 사회계층 속에서 차파는 자녀들이 혼인연령에 이르게 되면, 딸들을 출가시킨 이후에 남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아들들은 대부분 兄弟共妻의 혼인형식을 채용하여 이와 같은 가정의 형편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三兄弟共妻나 四兄弟共妻이 이르면 二兄弟共妻에 비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출가의 형식25) 또는 상속인이 없는 가정의 데릴사위로 보내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최대 기능은 연합식의 가정단위를 유지하여 가정의 공동체제 속에 소속된 토지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였다.

상층농노들은 하나의 협동화된 가정 단위를 유지하기 위해 한 가정 내에서 동포의 형제가 각각 또 다른 하나의 기본가정을 조직하여 토지가 분할되고 분산되는 것을 자제하여, 전체적으로 개인 지분을 보합하고 관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상층농노계층 사이의 혼인유형은 일부일처를 비롯한 일처다부의 형식이 상당부분 만연되어 있었다. 

2) 하층농노의 혼인문화


기본적인 생산의 토대가 없어 오로지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호가구인 하층농노로서의 ‘堆窘’은 ‘堆窮’이라고도 한다. 물론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경지에 구속받은 퇴군(속박퇴군)과 그렇지 않은 퇴군(미파퇴군)의 구분이 있지만 혼인의 형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이들을 협동화된 가정의 단위가 없는 동일한 농노계층으로 단일화하여 처리해도 무관하다. 퇴군이 토지를 획득하는 것은 각 개인의 단독적인 상황에 근거하며, 따라서 이들은 한 가정 합작체제의 공동계승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가정 단위의 중요성 역시 크게 감소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자녀가 결혼한 이후에 또 다른 한 가정을 건립했을 때 이전의 가정과는 반드시 분열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유아기부터 이들은 그들이 본래의 한 주간가정을 유지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만약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친밀하다면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부모와 동거한다. 부모가 연로한 이후에는 자녀의 가정에서 함께 거주하기도 하지만 이는 규정이 아닌 선택의 사항이며, 세습적으로 하나의 가정체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퇴군은 결코 차파와 같이 이익을 목적으로 한 혼인을 성사하기 위하여 치밀한 책략과 계획을 도모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세습하고 보존해야 할 재산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퇴군 집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부 소수의 일처다부의 혼인형태는 그 대부분이 부유한 가정(일반적으로 상업가정)에서 성사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합작된 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干豆’와 ‘囊生(또는 朗生)’ 역시 하층농노로서 상층농노인 차파와 같은 협동화된 가정단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입장이 다른 차파와 같이 굳이 일처다부와 같은 혼인형태를 선택할 명분이 없다. 따라서 퇴군을 위시한 하층농노 계층은 대부분 팽취혼(碰嘴婚)을 통한26) 일부일처인 단혼의 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는 티벳 대부분의 촌락에 거주하는 다수의 계층이 퇴군이였기 때문으로 결국 일부일처의 혼인형태는 티벳의 혼인문화 중 가장 보편적인 전형을 대변한다. 그러나 특히 노예인 낭생에 대한 혼인은 농노주의 심한 간섭을 받았다.27) 만약 예속이 다른 영주의 농노 사이에 이루어지는 혼인은 영주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분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혼인의 경우에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노동력을 분배하였다.28)

이외에도 토지로 인한 경제적 이익과는 무관했던 천민계층은 퇴군이 시행한 자유연애 형식의 팽취혼을 를 통한 일부일처의 기본형태를 유지하였다.   

이상에서 농노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계층사회의 입장과 이로 인해 선택한 혼인의 상황을 토대로 할 때,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을 일부일처․일처다부․일부다처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 일처다부와 일부다처의 형식은 군혼의 형식으로 이러한 전통적인 군혼문화는 티벳이 중국으로 예속되기 이전까지29) 지속되었고,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 분석을 통해, 티벳은 농노제라는 전통적 사회구조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계층에 따라 내재하고 있는 경제적 형편이 상이하였고, 이에 개인의 입장에 부합하는 유리한 조건의 결합형식을 선택하였으며, 결국 이와 상응하는 다양한 혼인유형이 표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티벳 전통의 혼인문화 속에 현존하는 특수한 혼인유형­일처다부와 일부다처 등의 군혼문화­에 대해서 그 토대를 단순히 사회구조의 원인에 국한한다면, 여전히 티벳의 사회가 계승하고 있는 특징적인 혼인유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적지않은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상에서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에 대해 분석한 결과, 귀족계층과 상층농노계층에서 군혼의 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특히 일처다부 형태의 성사 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려는 취지가 주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귀족계층에서는 가정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구성원의 이합집산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경이 유착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배경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기반이 빈약한 가정은 혼인형태의 운용을 통해 발전을 기도하는 양상이나 보였으며, 경제적인 토대는 공고하지만 정치적인 경쟁력이 부족한 가정 역시 일부일처 이외의 혼인형태를 선택하여 번영을 추구하였다. 결국 귀족계층 사이의 혼인유형은 이러한 정치․경제의 상호 수급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주요 관건이였다.

이외에도 농노계층은 상층농노인 차파와 하층농노인 퇴군의 혼인형태에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두 사회계층의 서로 다른 토지 소작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차파 계층은 결혼과 동시에 이를 통해 협력화된 가정단위를 공고히 하기를 희망하여 직접적으로 인구자원을 제어하였다. 차파의 이러한 목적 역시 협동화된 가정단위가 분리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어 일처다부의 혼인형태가 복잡한 경제형태를 적응해 나가는 데 유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결국 차파 계층은 농노제 사회 속에서 가정단위의 경제적 분열을 방어하는 방법으로 일처다부의 혼인유형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계층의 세습이라는 티벳사회의 한계 때문에 농노계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군혼의 목적에 정치성은 제외된다. 오로지 경제적인 목적에서 혼인을 통한 토지 분산과 축소를 방어하기 위해 차파 사이에 일처다부의 군혼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티벳 전체인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노계층에서 역시 다수의 일정비율을 상회하는 차파 계층의 일처다부 문화는 자생력을 가지며 전통으로 자리하여 지속되었고 현재적으로도 이러한 전통이 부분적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과 결과를 인정하더라도『티벳에서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군혼 전통문화의 형성배경은 과연 이상에서 고찰한 사회구조적 원인에 국한되는 것일까?』

상술한 티벳 전통 계층사회의 혼인유형 중 군혼에 속하는 일처다부와 일부다처의 형식 중 특히 일처다부의 형식은 현존하는 군혼의 유형 중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현재까지도 혼인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는 이러한 특수 혼인유형에 대해, 그 형성배경을 이상에서 고찰한 사회구조적 층위와 수요에 따라 자세히 파악하였다. 그러나 본고는 이상에서 도출한 결과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지만, 결국 티벳 전통 군혼문화의 주요원인은 사회구조적인 요소의 수용에 우선하여 관념적 요소가 토대가 되고 있음에 주의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티벳이라는 고유의 인문지리 환경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은 티벳사회의 독특한 관념을 생산하였고, 이것이 군혼문화의 형성을 자생하게 하는 배경에도 작용하였음을 전제하였다. 특히 이와 같은 배경은 토지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취지와 부합하여 군혼문화가 티벳 전통의 혼인문화로 정착되는데 일조하였을 개연성에 주목하였고, 이를 위하여 티벳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을 환경에 대한 순응, 종교의 초월의식, 경제적인 이익추구로 구분하여 분석할 것이다.


Ⅲ. 군혼문화의 형성배경


티벳의 지리와 환경은 기타의 지역과 비교할 때 태생적으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티벳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 요소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여된 자연과 그 속에서 적응하고 단련하는 인간에 대한 조화는 환경에 생활이 일치하는 특징은 물론 이로부터 생성되는 독특한 관념과 사고를 형성한다. 특히 티벳은 지형과 지리 환경에 의해 폐쇄되고 고립되어 일종의 문화가 자생 또는 유입된 경우 그 원형이 철저히 보존되었다. 결국 본고에서는 티벳에 현존하는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이 토지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농노제 사회구조에서 출발한 혼인의 전통임을 감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군혼문화 형성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이에 우선하여 군혼문화의 형성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관념적 배경이 기존했을 것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을 이에 대한 관념적 사고의 형성을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하여, 먼저 자연과 본성을 수용하는 숙명론을30) 토대로 한 개방적 사고 즉 ‘환경에 대한 순응’과 ‘종교의 초월의식’을 고찰하고, 이후에 이미 살펴본 사회구조에 의한 ‘경제적 이익추구’를 부차적인 원인으로 배치하여 고찰하였다.

   

1. 환경에 대한 순응


티벳은 지구의 최고․최대 고원인 티벳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티벳 지역은 이 고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티벳은 해발 4000m가 넘는 파미르고원과 함께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다. 고원 주위에는 험준한 습곡산맥이 뻗어 있고, 빙하가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경계를 이룬다.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한 히말라야산맥은 길이가 2400km이고 평균해발고도가 6000m 이상으로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한 7000m 수준에 이르는 산정이 대개 40개에 이른다. 북쪽 끝에는 곤륜산맥이 있고 곤륜산맥에서 조금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곤륜산맥의 지맥인 탕구라산맥이 뻗어 있으며, 탕구라산맥의 동부는 청해성과 경계를 이룬다.

또한 티벳 중부는 카일라스산맥(강디쓰산맥이라고도 명명)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藏北高原과 藏南谷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곤륜산맥 이외의 여러 습곡산맥은 티벳의 동부지역으로 몰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남북으로 바꾸고 있는데, 이곳에서 여러 개의 높은 산맥과 깊은 협곡이 교차하며 고산협곡지구를 이룬다.

티벳의 내부 역시 복잡한 지형을 나타낸다. 카일라스산맥 이북과 곤륜산맥 이남은 모두 장북고원이라 일컫는 5000m 전후의 광활한 고원을 이룬다. 이 고원은 기복이 비교적 완만한 산지와 분지로 구성되며 이 분지 안에는 많은 함수호가 형성되어 있다.

카일라스산맥과 히말라야산맥 사이에는 길고 거대한 계곡이 동서로 뻗어 있고 인더스강 상류와 브라마푸트라강(티벳에서는 창포강이라 명명, 중국에서는 얄룽장뽀강으로 명명)이 여기에서 발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가 4000m 전후인데, 브라마푸트라강이 남쪽으로 물길을 바꾸는 동쪽 끝에서는 해발고도가 3000m로 낮아진다. 티벳 내의 주요하천은 브라마푸트라강과 동쪽 끝의 金沙江(長江의 상류)을 비롯하여 살윈강 및 깊은 협곡을 이루면서 흐르는 메콩강 상류이다. 호수는 모두 빙하의 침식과 퇴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대부분인 함수호이다.

티벳은 북위 7-27°사이에 위치하여 위도상으로는 그다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고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한랭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특히 곤륜산맥에는 식생이 전무한 고산한랭지역도 분포한다. 1월의 평균기온은 0℃ 이하이며, 7월에도 대부분의 지역이 20℃를 넘지 않는다. 또한 일교차가 크고 강풍이 부는 날이 많은데, 특히 장북고원은 연평균 기온이 -5℃ 안팎이고 연평균강수량도 200mm 이하이다. 장남곡지는 동부의 브라마푸트라강 골짜기로부터 계절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연평균기온은 10℃ 안팎이고 연강수량도 1000mm를 넘는 지역이 많다.31)     

이상은 티벳의 자연․지리환경에 대한 대강이다. 이와 같이 척박하고 험준한 환경은 티벳사회에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감을 조성하였고, 자연과 인간이 결합하여 일치된다는 사고를 주축으로 자연을 수용하고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단련하였다.32) 티벳의 자연과 환경은 물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이성적 역량을 배양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생산의 조건이 존재의 형식을 결정한다는 유물적인 논리가 티벳사회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티벳사회의 여건은 이들에게 현상에 적응하고 환경과 소통하는 개방적인 사고를 이입하여, 자연환경에 대한 유연한 대응능력을 유도하였다. 특히 유목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목업중심지구에서는 유목이라는 산업환경 역시 티벳사회에 소통과 개방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는데, 특히 상술한 혼인유형의 다양화는 성(性)에 대한 티벳의 개방된 심경과도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티벳사회는 지리환경에 의한 자연과의 조화와 이에 대한 순응 및 유목사회의 개방성으로 인하여 심정의 개방을 유도하였고, 특히 성에 대하여 대단히 개방적인 사고가 정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개방과 소통을 중심으로 郊宴이나 野宴 등의 오락활동이 발달하였으며, 이를 통한 이성 사이의 야합과 결집 역시 자연이나 생활의 일부로 용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방적 사고는 밀교(비밀불교)를 수용하는 데 있어 주요 토대로 작용하였고, 밀교의 중심사상에서 초월의식은 발휘되고 있다.  


2. 종교의 초월의식


티벳은 부족한 산소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삶을 부지하였으며, 이를 배경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이와 같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정신적인 토대를 절실히 요구하였고 이는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불교가 티벳으로 전래되기 이전에 뵌뽀교는 당시의 수요에 따라 그들의 심리와 민족단결 및 전통도덕의 토대로 자리하면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뵌뽀교는 티벳의 원시사회에서 발원하였으며, 티벳의 기록에 의하면 현재 阿里地區의 남부에서 시작하여 이후에 얄룽짱뽀강을 따라 서로부터 동으로 널리 확산되어 전체 티벳으로 전파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뵌뽀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다 이에 상응하는 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티벳에서 숭배하는 대상에는 하늘․땅․달․별․번개․우박․산천을 포함하여 심지어 흙과 돌․초목․금수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만물의 영혼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철저한 금기사항이였고, 제사를 지낼 때는 영혼을 위로하고 무마하기 위해 동물을 희생하여 바쳤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투르판왕조 당시의 전례활동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뵌뽀교는 원시종교의 일종이지만 지금까지도 그 여파는 대단하다.

티벳사회의 발전에 적응하기 위해 뵌뽀교가 많은 이론과 이념을 정비하고 있을 때, 송짼감뽀의 불교흡수와 장려로 인하여 뵌뽀교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다.33) 그러나 송짼감뽀 사후에 다시 왕조의 실권이 뵌뽀교를 신봉하는 귀족과 대신들에게 이양되자 공개적으로 불교를 탄압한다. 그러나 치송데짼이 즉위한 이후에는 불교의 발전을 촉진하고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불경번역사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는 부활의 국면으로 전향한다. 이처럼 뵌뽀교와 불교가 서로 갈등을 겪으며 세력다툼을 벌이던 때를 즈음하여 투르판으로의 불교전파를 위해 중국의 승려가 투르판으로 들어와 桑耶寺에 귀의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곳에서 뵌뽀교 신도와 불교 신도가 함께 공생하면서 많은 종교적인 마찰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뵌뽀교와 불교를 종합하여 조화시킨 티벳 특유의 종교(티벳불교 또는 라마교)를 생산하였다.34)        

티벳에 처음 소개된 인도불교는 顯敎와 密敎로 나눌 수 있는데, 양자 모두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는 동일하지만 현교는 지혜를 완성하는 방편으로 육바라밀을 수행하고 밀교는 현교보다 수행에 있어 폭넓은 방편을 선택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힌두요가와 힌두밀교의 방법을 결합시킨다.

티벳불교는 밀교 수행을 강력한 방편으로 사용한다. 밀교 수행은 결과의 쾌속성이 장점인 반면 타락이 용이하여 위험부담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 이와 같은 티벳불교는 닝마파․까규파․샤까파․겔룩파 등 네 학파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네 종파가 가르침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특정한 밀교 수행을 선호하는 등의 수행 방법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티벳에서의 불교 정착 이후 라마교의 정체로 알려진 밀교 사상은 지금까지 티벳사회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견고한 토대이며, 이는 신비라는 요소로 대중에게 수용되고 있다. 특히 밀교의 인생관은 금강승의 비밀과 대긍정의 논리로 구분된다. 이 중 대긍정의 논리에서는 ①영원한 현재 ②유쾌한 삶 ③올바른 논의 ④화쟁의 교화 ⑤현재에 대한 최선의 향유를 제시한다. 이러한 대승불교가 중심이 되는 밀교의 기본사상은 티벳사회에 조화의식과 초월의식이 자생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나아가 함께하는 우주적 생명에 대한 자각을 통해 조화된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관을 형성한다.35) 밀교에서는 우주의 신비한 절대진리를 감지하고 체득하도록 가르친다. 깨달음의 세계는 신비체험이라 일컫는 경지이며, 이는 말과 사고와는 무관한 초월의 세계이다. 밀교에서는 모든 시공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이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인간을 구제하는 절대적 교리 역시 신비적인 것이여야 하기 때문에 밀교는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신비주의란 인간 생명의 깊은 내면에서 또는 신비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인 가치라는 것을 파악하여 우주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일원화하려는 주의이다. 밀교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행법이나 의식은 그러한 초월적 가치인 聖과 상대적 개념의 俗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밀교에서의 사고와 행동의 주요 지침은 전환․초월․해탈의 순차적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열반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인간고를 이탈하여 절대적인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 밀교에서는 유쾌한 삶에 대한 지향을 목표로 한다. 또한 밀교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로 살기 위해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하여 시간의 개념이 없는 시간을 살고자 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한 추상의 개념으로 三世는 오직 현재 뿐이다. 결국 지금의 삶은 현재로 과거와 미래를 관통한 삶이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오늘의 하루 삶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인식한다.36)

이러한 밀교의 기본인식과 목표는 밀교의 수행의식은 ‘람림(Lamrim)’을 통해 그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람림은 밀교 수행으로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단계이다. 람림은 수행자의 심태에 따라 초급․중급․고급으로 구분된다. 초급은 다음의 생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수행자들이고, 중급은 자신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는 수행자들이며, 고급은 부처의 경지 오르기를 기도하는 수행자들이다. 저급의 단계는 고급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기반이 되기 때문에 소승을 확고하게 한 이후에 대승의 단계로 상승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람림 수행의 기초는 초월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업에 대한 정화와 해탈이다. 이를 위해 티벳인들은 끊임없이 오체투지37) 금강살타 명상<A class=con_link href="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sevang&categoryNo=2#FOOTNOTE38" target="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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