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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wed 2006.09.29 12:34 조회 수 : 2104 추천: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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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9일, 토요일, 므즈케타 (Mtskheta)

어제 밤에는 갑자기 많은 여행객들이 들어 닥쳤다. 모두 십 여명은 잔 것 같다. 우리 방에도 나와 이스라엘 친구 외에 프랑스 여자 두 명과 동양 젊은이 한 명해서 다섯 명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방에서 잔 동양친구가 안 보인다. 벌써 간 모양이다. 숙소 주인 나시에게 어느 나라 친구냐고 물어보니 등록을 안 해서 모르겠다면서 방 값을 안 냈는데 벌써 갔냐고 놀랜다. 어제 잠깐 인사말만 나누고 다른 얘기는 못 했는데 영어가 제법 유창했다. 한국 젊은이였을 수도 있을 텐데 더 이상 얘기를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돈을 안 내고 갔다니 이해가 안 간다. 사용한 침구는 아주 잘 개어놓고 나갔다.

아침에 밖을 내다보니 푸른 하늘이 보인다. 오랜만에 개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 날씨가 하루 종일 가지는 못하고 오후에는 다시 흐려졌다. 이스라엘 친구는 어제 밤늦게까지 안 돌아와서 나시가 한참 걱정을 했다. 티블리시에는 밤에 나가는 것은 안 좋단다. 범죄가 제법 있는 모양이다. 못 사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이 나라의 두 지역에 문제가 있어서 피난민이 생겼고 그들 대부분이 티블리시에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고 있단다. 이스라엘 친구는 어제 이스라엘 여행객 두 어명을 만나서 늦었다며 아침에도 일찍 나가버린다. 아마 오늘도 그들과 함께 행동을 하는 모양이다. 혼자 여행하기에 경비절약을 위해서 (특히 택시요금) 티블리시 근처 관광하는 것을 함께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틀렸다.

오늘은 티블리시 근교에 있는 므즈케타 (Mtskheta) 구경을 갔다. 이 나라 지명은 자음이 너무나 많아서 발음하기가 힘들다. 나시에게 물어보니 “므즈헤타” 혹은 “므즈케타” 라고 발음한다 한다. 지하철과 미니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걸려서 갔다. 인구 만 명 정도의 조그만 도시인데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조지아의 옛 수도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티블리시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집집마다 포도넝쿨이 많이 보인다. 이곳은 성 니노 (St. Nino) 얘기가 많은 곳이다. 성 니노는 서기 4세기경에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여자 성인이다. 지금의 터키에 살던 미천한 노예 출신이었는데 14세 때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고 당시 조지아의 수도였던 이곳에 와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한다. 선교를 시작한지 얼마 후에 이 나라 여왕 Nana의 중병을 기도로 고침으로서 왕의 명령으로 전 국민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어서 옆 나라 아르메니아 다음으로 역사상 두 번째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조지아 최대 규모의 성당이라는 Sveti-Tskhoveli Cathedral이 있다. 정말 큰 규모였다. 이 성당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었다는 옷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못 박히던 날 예루살렘을 여행하던 이 도시의 어느 유태인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유태인의 여 동생이 예수님의 옷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으면서 옷을 잡아채고는 잡은 채로 죽었다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빼어내려고 했으나 빼낼 수가 없어서 할 수없이 함께 묻었다 한다. 그리고 후에 그 장소에 이 교회를 세웠다 한다.

므즈헤타 동쪽에 있는 산꼭대기 위에 있는 Jvari Church는 조지아 기독교의 최고 성지라 한다. 택시로 올라갔는데 올라가니 므즈헤타 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곳에 성 니노가 조지아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세웠다 한다. 므즈케타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나 보이는 위치다. 교회 안에 들어가니 별로 성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결혼 그룹들이 들어와서 비디오를 찍느라고 야단이었다. 티블리시 사람들은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다 이곳으로 몰려오는지 이 교회와 Sveti-Tskhoveli Cathedral에는 여러 결혼 그룹이 몰려있었다. 결혼 그룹은 많은데 이 외로운 외국 여행객을 초대하는 그룹은 하나도 없다. 조지아 사람들은 손님 대접을 후하게 하기로 이름나있다 한다. 한번 초대를 받았다 하면 웬만해서는 놔주질 않는다 한다. 술을 너무 많이 먹인다 한다. 초대연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건배를 하는데 다 받아 마셔야 한다. 주는 술을 거절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최대의 실례란다. 나 같이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정말 문제인 것이다. 술과 담배, 내가 당해낼 수 없는 것들뿐이다. 초대를 해도 걱정이지만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 섭섭하다.

오늘 점심은 므즈헤티에서 또 킨칼리로 먹었다. 이렇게 자주 먹다가는 조만간 물릴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을 먹나 걱정이 된다. 케밥을 다시 먹기는 싫은데 좀 걱정이다. 숙소 근처에 맥도날드가 있으니 안되면 맥도날드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겠다.




 

조지아 최대의 규모인 Sveti-Tskhoveli Cathedral, 예수님이 입으시던 옷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성벽은 요새를 방불케 한다





성벽에 튀어나온 것은 이렇게 생긴 구멍인데 처음 본다





건장하게 생긴 사제가 성당 마당을 걸어간다





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사제는 아침부터 웬 하품이





므즈케타 강변에서 멀리 보이는 Jvari Church, 므즈케타는 조지아의 옛 수도란다





성 니노(St. Nino)가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웠던 곳이라고 한다





조지아 기독교의 최고 성지라 한다





성 니노가 십자가를 세웠다는 장소





결혼 철의 주말이라 그런지 결혼 그룹을 여러 번 보았다





결혼 가운이 좀 추워 보인다





신랑이 친구와 사제와 함께






므즈케타 근처 산에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요새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 고장은 포도가 많이 나는 곳이다, 집 정원도 포도나무가 무성하다





이 도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4세기 경 향수병, 그 때도 유리가 있었나 보다





Jvari Church에서 내려다 본 므즈케타 시 전경


2006년 4월 30일, 일요일, 고리 (Gori)


어제 밤에는 아침 일찍 없어져서 소동이 났던 20대의 동양 친구가 나타났다. 도망 간 것이 아니고 일찍 나간 것뿐이었는데 말도 없이 나가고 짐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나갔으니 소동이 났던 것이다. 가냘프게 생긴 20대의 일본 청년인데 배낭이 무겁다고 계속 어깨를 주무른다. 나중에 보니 본체만도 1Kg은 될만한 대형 카메라를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필름 카메라라 필름도 조그만 가방으로 하나다. 어제는 어딘가 멀리 갔다온 모양이다. 영어를 잘 한다 했더니 조끔 밖에 못한다고 한다. 별로 말이 없는 친구다.

어제 밤에는 20대 미국친구들 세 명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미국 사람들을 만나니 고향사람들을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부터 중국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중이라 한다. 씩씩하게 보이는 친구들이다. 내가 말을 걸자 손을 내밀며 “I am Tom." 하면서 인사부터 청한다.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만의 습성이다. 워싱턴 D.C.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로부터 터크메니스탄 (Turkmenistan) 비지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얻었다.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5일 통과비자를 (transit visa) 좀 어렵게나마 받았다 한다. 5일 안에 나가야 하는데 일단 입국한 후에 연장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한다. 그러나 현재 계획은 5일 안에 출국을 할 생각이라 한다. 나도 이 나라 비자를 아직 못 받았는데 이 친구들처럼 이스탄불이나 앙카라에서 통과비자를 얻어봐야겠다. 이 나라는 비자 받기 까다롭기로 이름난 나라다.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 비자를 내면서 그 나라 사람을 하나 만났는데 비자 받기 힘들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비자에 관한 한 외국 배낭여행자들 만큼 최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본국 사람들은 오히려 모른다.

오늘 날씨는 아침에는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더니 오후에는 해도 잠깐 나왔다. 오늘은 스탈린의 고향 고리 (Gori) 구경을 가는 날이다. 9시쯤에 숙소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디두베 (Didube) 버스 정거장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려서 고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차를 잘 못 탔다. 고리 시내로 가는 차가 아니고 고리 근처를 지나가는 미니버스다. 고리에 간다고 해서 탔는데 고리 시내로 가는 것이 아니고 고리에서 4Km 떨어진 길가에서 차를 세우더니 저기가 고리라고 손 고락으로 가리킨다. 내릴 수밖에 없는 일이라 내리니 어디서 택시 운전사가 나타나서 고리까지 택시를 타란다. 날씨도 좋고 멀어 보이지도 않아서 걷겠다 하니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버린다. 걸었다.

걸으면서 스탈린에 대한 생각을 좀 했다. 스탈린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나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구 소련에서도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남한)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자로 미움의 대상이 되고있다. 그러나 조지아에서는 아직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자기 나라 사람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이 나라 사람들은 스탈린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 것은 스탈린 때문에 이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아니었더라면 나치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마 거기에 반대를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세계는 스탈린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만약 이차대전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치자.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 것일까. 서양에서는 독일이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고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는 소국이 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말살되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고 시베리아는 일본 땅이 되었을 확률이 많다. 중국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역시 소국이 되었을 것이다. 만주, 내외몽고, 신장, 티베트, 그리고 중국 남서지역에 있는 소수민족 지역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한국은 아마 일본 그늘 밑에서 독립을 성취했을 것이고 한국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공상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스탈린의 업적은 부인하기 힘들다.

스탈린에 대해서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이 있다. 스탈린이 이 지역 출신인 것은 옛날부터 알았지만 러시아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고 순수한 조지아 사람이다. 조지아 사람이면 소련 내의 수많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소수민족 출신이 전 소련의 지배자가 되었을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중국의 모택동이나 등소평이 중국 남서 지역에 사는 장족이나 묘족 출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일이 소련에서는 일어났는지 이 여행이 끝나면 한번 알아 봐야겠다.

스탈린의 손자 한 명이 이곳 티블리시에서 인터넷 카페를 경영한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35세 정도라 하는데 사실이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 스탈린 큰아들의 아들인가 작은 아들의 아들인가, 아니면 미국으로 망명한 외동딸의 아들인가. 스탈린의 큰아들은 이치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한다. 히틀러가 졸병인 스탈린의 아들과 독일 장군 포로 한 명과 교환하자고 제의를 하니 스탈린이 거절했다 한다. 장군을 어떻게 졸병과 교환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한방 맞은 것이다.

스탈린 박물관에서 네덜란드 부부 여행객을 만나서 같이 구경을 했다. 여행을 하면 네덜란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미국사람들 만큼 반가운 사람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이다. 히딩크와 아드보카 감독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다른 유럽 사람들에 비해서 친절하고 마음이 터진 사람들이다. 한번도 마음에 안 드는 네덜란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박물관 입장료는 80전인데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한 장 찍는데 50전씩 받는다 (이 나라 돈으로). 알고 보니 박물관에서 일 하는 여자들 수입인 것이다. 외국사람들에게만 받는 모양인데 우리에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300원 정도) 이들에게는 큰 수입인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카메라 사용료를 입장할 때 미리 받는데 이곳은 안에서 사진 당으로 받는다. 카메라 사용료를 받는 것은 외국 여행객들 주머니를 털자는 제도인데 외국 여행객들에는 반갑지 않은 제도다. 숙소 주인 나시 얘기가 이 나라 월급은 너무나 적단다. 수십 년 동안 독일어 선생 일을 하고 은퇴 연금으로 받는 돈이 월 $15 정도란다 (고기 1Kg 가격이 약 $4이란다). 자기 아들이 의사로 병원에서 일하는데 월급이 $100 정도란다. 의사인 아들보다 80 고령의 나시의 수입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어제 열 명이 잤으니 아들의 한달 수입인 $100을 번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들에게 매달 보조금을 준단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돈을 보태줘야 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이런 나쁜 경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지하철에서 사진을 찍다가 경찰한테 걸렸다. 경찰이 지키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어떠랴 싶어서 찍었는데 보고는 달려와서 지우라고 한다. 내가 지우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 찍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간다. 인도에서 다리 사진을 찍다가 경찰도 아닌 어떤 놈에게 걸려서 몸 쌈을 한 기억이 난다. 이곳 경찰은 그래도 신사적이었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나중에는 오히려 미소까지 짓는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싫어하는 것 할 필요가 없다.

고리에서 돌아올 때는 미니버스가 아니고 큰 버스를 탔는데 한 친구가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워댄다.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중에 내릴 때 보니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사인이 조그만 하게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잘먹고 술 많이 마시고 담배 많이 피면서 산다. 남자나 여자나 뚱뚱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인도 거지는 바짝 말랐는데 이곳은 거지도 뚱뚱하다. 먹는 걱정은 없단 말인가 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못 살았을 때는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세계 아무리 다녀봐도 옛날 우리나라처럼 못 사는 나라는 없다 (아직 아프리카는 못 가봤으니 장담하는 것은 이를 찌 모르지만). 50년 전의 한국을 생각하면 가끔 가슴이 찡해진다. 다시는 그렇게 가난하게 되지 말아야된다고 생각하니 이북 동포들 생각이 나서 또 가슴이 찡해진다.

오늘은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음식점은 이제는 담배연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맥도날드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모양인지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다. 저녁때는 이틀 전에 저녁을 푸짐히 먹은 곳에서 먹었는데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심히 체크하고 다행히 별로 없어서 빨리 먹고 나왔다. 만두와 전 번에 먹은 내장탕을 시켰는데 무어라고 하더니 가져오는데 보니 계탕이다. 맛이 좋아서 아무 소리 없이 잘 먹었다.





고리 가는 길





고리 시내 전경, 중간에 보이는 조그만 탑이 있는 건물이 스탈린 박물관이다





스탈린 박물관 본관





별관에는 스탈린이 살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스탈린이 살던 집





지하실에서 스탈린의 아버지가 구두수선을 했다





스탈린이 포츠탐 회담에 갈 때 타고 갔던 기차





기차 안 복도





기찬 안 회의실





기찬 안 스탈린의 침실





스탈린 열 살 때 사진, 옆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다





스탈린의 가족 사진, 아래는 두 부인, 위에는 이차대전 동안에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죽은 큰아들





스탈린의 작은 아들, 후르시초프 집권 동안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한다





스탈린의 작은 아들과 외동 딸, 딸은 1960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스탈린의 사무실 집기, 물건 욕심은 없었던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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