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엘앤시(주)

kimswed 2016.05.25 08:31 조회 수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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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해외 20개가 넘는 거래처의 긴급한 메일을 처리하며, 매월 짜여있는 실적목표 달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나의 일과다. 일과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일은 산더미다. 근무시간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이지만 퇴근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미팅시간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혼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나름대로 구성하며 하루를 보낸다.

 

스펙쌓기보다 중요한 나만의 스토리 채우기
매일매일 무역업무와 전쟁을 하다보니 전투 내공은 매일같이 강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꿈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화L&C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다. 나는 지방대 출신으로 스펙이 평범하지만 우리 회사가 1명을 뽑는 인조대리석 수출 포지션 경력직에 당당하게 합격을 했다. 이 회사에 합격하기 전에는 중견·중소기업에서 일을 했었다. 같이 면접을 보러 왔던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훌륭한 회사에서 근무한 사람들이었다. 뛰어난 스펙과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 치열한 경쟁이었지만 그들은 내 스토리를 이기지 못했다.

 

내가 처음 해외영업에 적성을 느끼게 된 것은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25살 대학 졸업시점까지 난 내 꿈을 찾지 못했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떤 직장을 내 천직으로 삼아야 할지 불확실성 속에서 방황을 했다. 자격증만 있으면 취직이 보장되는 시험에 관심을 가져도 보고, 여러 시험을 치르기도 했지만 그리 영특한 머리를 가지지 않았던 평범한 나는 친구의 ‘워킹 홀리데이’ 준비 소식에 귀를 솔깃하게 되었다. 나는 ‘그래 이 길이다’ 라는 생각에 워킹 홀리데이를 필사적으로 준비했고, 합격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과 이민가방을 한 짐 챙겨 훌쩍 떠나버린 것이 2006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다. 집도 미리 구하지 않았었고, 직장도 구하지 않았었다. 노래방, 과외, 식당일 등등으로 벌어 모아둔 수중 500만원이 전부였다. 나에겐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고 그 변화의 기점을 캐나다로만 여긴 것이다.

 

캐나다로 무작정 워킹 홀리데이
호스텔에서 정보를 얻어 구직사이트를 통해 이력서를 넣기 시작하였으며, 가져온 국제학생신분증을 통해 토론토대학교에서 저렴하게 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 면접을 보았지만 정규직은 역시나 불가능. ‘자유계약직’이라는 타이틀로, 캐나다의 한 마케팅회사에 입사를 했다. 현재 쿠팡, 티몬과 같은 소셜커머스 형태의 프로모션 상품을 도어 투 도어 (Door To Door) 방식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말 그대로 세일즈맨이었다. 이 직장의 좋았던 점은 그날 판매한 수당을, 그날 정산하여 받는다는 것이었다. 당장 한 푼이라도 급했던 나는 하루에 100여 집을 돌아다니며 고객에게 일일이 상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자연스레 영어 국가권에서의 세일즈에 친숙하게 되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세일즈가 즐거웠고 재미있었다. 영어를 계속 쓰면서 새로운 표현을 익히게 되어 공부까지 덤으로 한다는 큰 장점은 내가 해외영업을 본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2008년 2월, ‘S로직스’라는 중견기업 취직에 성공했다. 내가 원하던 ‘해외영업’ 파트였다. S로직스는 선박 해외영업과 철강원재료·제품 무역이 주력인 업체로서, 당시에 연봉이 가장 많은 기업 중 하나였기에 주저 않고 입사하게 되었다.

 

무역 초보에서 전문가로
S로직스 무역본부에 입사한 나는 영업에 대한 경험은 풍부했지만 무역에 대해서는 CIF, FOB를 구분도 못할 만큼 걸음마 수준이었다. 동기들에 비해 지식이 부족했던 만큼 업무에 부하가 걸려 퇴근시간이 늦어졌다. 밤 11시가 고정 퇴근시간이 될 정도로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렸다.
‘실무가 아무리 중요하지만, 이론 없는 실무는 없다’는 생각에 2008년 8월부터 10월까지는 한국무역협회 무역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수출입실무 주말과정 61기’에 등록해 주말에도 공부를 했다. 2008년 12월에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무역영어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9년 6월에는 한국무역협회에서 주관하는 국제무역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내가 담당했던 아이템은 ‘몰리브데늄’이라는 스테인리스 원료인 희귀금속이었다. 원료 시장의 특성상 런던금속거래도(LME) 거래가격이 중심이 되어 매일같이 제품 가격이 변동하였고, 그 변동폭도 컸다. 금값, 유가에 따라 시장가격이 등락하기 때문에 국제시장 파악은 매일 아침에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이었다. 환율, 유가, 금값, 국제시장 상황, LME가격, 주식동향 등 매일 아침에 자료를 취합하여 본부인원들에게 회람하는 것이 나의 아침 일과 중 하나였다.


매일 밤낮으로 공부하며 무역거래를 성사하고, 무역에 관한 국제시장 상황을 매일같이 정리하면서 ‘릭 킴’의 인지도는 서서히 높아져 갔다. 무엇이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릭 킴’에게 먼저 물어보란 말이 생길 정도로 무역전문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되돌아봐도 뿌듯하고 기쁘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학생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의 폭이 깊어졌으며, 월급을 받으면서 이러한 내공을 키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S로직스 직원들과 어울려서 매주 월요일 농구동아리를 통해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이 회사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투기와 투자를 구별하라
몰리브데늄이라는 제품의 변동과 무역거래는 단순히 생각하면 주식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국제원자재 거래는 시장의 흐름에 따라 돈을 많이 벌 수도, 그리고 심각하게 돈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업들은 헷지(Hedge) 방안을 마련한다. 수익이 나면 수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적용하고, 손실에 대비한 출구전략도 마련해 놓는다.


S로직스는 BDI(벌크선운임지수)가 고꾸라지면서 기업회생절차를 밟게 되었다. 보통 해운사들은 자사 소유의 선박 혹은 남에게 빌린 선박(용선)을 다른 기업들에게 빌려줌으로써 이익을 창출하는데, 장기로 빌린 가격이 높은데 당장 단기로 빌려주는 가격지수가 폭락을 해버리니 제대로 버티기 어려웠던 탓이다.
원자재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부터 시작하여 2009년 전 세계 시장은 말 그대로 ‘폭락’을 경험했다. 100만원 했던 원자재 가격이 50만원으로 반토막이 날 정도였다. 고객사들은 이런 상황이 되면 긴급한 물건이 아니고서야 구매를 연기한다.


장기계약을 맺은 기업과의 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S로직스는 법정관리절차에 들어갔으며 신입사원까지 정리해고 되는 등 투기의 무서운 종말이 어디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존경하였던 무역본부장께서도 등재임원으로서 본 사태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무역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무역전문가로 성장하도록 도와준 분이기에 멘토로 여겨왔었다. 그런 분이 책임을 지고 퇴사를 하시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런 그가 사업을 독자적으로 시작한 뒤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선뜻 거절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2011년 S로직스에서 인정을 받아 대리로 진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임을 따라 직장을 옮긴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처럼 ‘J개발’이라는 회사에 합류했다.

 

사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J개발은 두 가지 사업을 했다. 첫째는 폐타이어에서 철과 고무를 분리하여 판매를 하는 도시광산 프로젝트였고, 두번째는 규석을 채굴하는 광산 프로젝트 일이였다. 폐타이어는 전 세계에서 수급했다. 그런데 ‘폐’ 타이어이기 때문에 타이어만 있는게 아니라 쓰레기도 함께 있을 수가 있고 쇠파이프들도 들어가 있을 때도 있다. 제대로 된 원료를 수급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파키스탄까지 가서 원료를 확인하고 계약을 진행했지만 다른 바이어가 더 높은 가격에 물건을 낚아채가는 바람에 계약이 무산되기도 했다. 대기업이라면 법무팀을 동원하여 계약위반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고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일이겠지만 중소기업의 한계를 빨리 직시해야만 했다.


시장에 반등이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설비 투자를 진행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철 가격은 떨어져만 갔다. 원료 시장은 침체되었고 고정설비 투자에 대한 월비용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회사 자체의 신용이 부족하다보니 사장명의로 대출을 받아야 했다. 모든 재산은 저당 잡히고, 직원들 월급이 감봉되거나 해고되었다. 나도 J개발에서 ‘차장’ 직함으로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적은 월급이 아니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거래처에서도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웃으면서 회사를 다니기는 어려웠다.


사업은 정말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J개발의 도시광산 프로젝트는 단순 개인사업을 넘어 P사, S사 등과 같은 대기업 계열의 상장사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안하고 투자를 받아 진행한 대형 프로젝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사람들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해임되고, 구속되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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