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흥

kimswed 2014.04.09 15:16 조회 수 : 1217 추천: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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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월남 교민회장 이순흥

베트남 최고의 기념일은 사이공 해방 기념일이다. 바므어이탕쓰(4월 30일)라고 하는 이 날이 오면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순흥 전월남 교민회장이다. 이에 그 역사적인 순간의 가슴설렘을 재조명 해 보기로 한다.

이순흥

(1938년 1월 3일 서울)

덕수상고. 한국외국어 대학교 영어과 졸업
북아통신사 무역부장. K,C무역(주) 대표이사,    
미국 A.I.U국제보험회사 사이공지사 검사역(1968)
일본 오야도마리(주) 사이공지사상,  순흥통상(주),  한월통상(주) 대표이사
재베트남 교민회장 (1975.4 ~1981,5,31)   
보국훈장 통일장 수훈(1981). 국가유공자.(1993)
호치민 한인회 2~3대 회장 역임  
제7-10기 해외 평통자문위원 
주호치민 원로회장(6,7,10,11대)  
초대 대한노인회 베트남 지회장
호치민 국제학교 재단이사장.


흥선생은 '1968년 부터 1981년 5월 30일 까지의 만 12년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월남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월남은 월맹정권에 의해 해방 되었고 석천선생은 이 세계사적인 사건의 한복판에서, 민간인 신분으로서 이 엄 청난 소용돌이를 몸소 체험하였다.
과거, 고철과 비철 및 미 8군 잉여물자를 취급하는 버클레이사 의 에이전트를 하고 있던 1968년 2월 16일 베트남의 빈호아 쪽 으로 고철 검품을 하러 왔었다.  월남으로 와서는 사이공시내 에 있는 오리엔트호텔 401호에 묵었는데, 온지 얼마되지 않아 서 구정공세가 있었다. 사이공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이대로 죽는줄 알았다고 하였다. 급히 구조요청을 하 여 보내온 트럭을 타고 주월사령부로 피신을 하였었다. 그후 순흥통상을 설립하여 한국인 직원 10명과 월남인 200여명을 두고 전쟁 폐물자인 고철,비철을 수집 수출하는 일을 하였다.
그해 년말에, 지금의 쩐흥다오길에 있는 소방서 근처에 오리 엔트 호텔이 있었는데, 그 곁에 아리랑 식당이 있었다. 주인은 육군대령출신인 안교문씨 였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연 히 대학동창을 만났는데, 전쟁이 한참인데 고철 수집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하면서 소개 해준 회사가 미국 A.I.U 보험회사 였다. 면접을 마치자 마자 즉시 일을 하라고 하여 검사역으로 근무하면서 순흥통상 일도 병행 하였다.
그당시 나의 기억으로는 현 딘빈푸 쪽에 배대령이라는 분이 하 던 코리아하우스라는 한국 식당이 있었고, 대사관에서 운영 한 다는 대형 한국식당인 클럽 코리아나도 레뀌돈 쪽에 있었다.
1975년 4월 30일부터는 창살없는 감옥 같은 사이공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1981년 5월 30일 까지  재월교민회장으 로 봉직하면서,  김상우 목사를 포함한 170여명의 우리교민들 과 한국공관원 8명(이대용 공사, 이규수 총영사, 김경중 영사, 김교양 통신과장, 양종렬 통신사, 신상범 총무과장, 서병호 총 경, 안희완 영사) 외에 월남 동반가족과 이산가족 총 일천여명 의 억류교민들을 무사히 보살피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히 힘들었던 일은 교민중 누구 하나도 낙오자 없이 귀국을 하게한 점도 있었지 만, 이대용 공사, 서병호 총경, 안희완 영사등 구속된 외교관 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일이었다. 이일을 깨끗이 마무리 하는 석천선생의 탁월한 외교능력이 헌신적으로 발휘 되었다.
민간인으로서 그 어려운 대사, 영사업무를 도맡아 여권과 비 자를 발급하고 비행기표를 무난하게 처리 하였다. 이러한 공 로로 귀국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 (제 398호)을 수여 받았고, 그 후 김영삼대통령으로 부터  국가 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이렇듯 월맹정권의 치하에서 보낸 6년 간의 삶은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삶이 아니었는 가 싶다. 이는 비단 월남인의 민족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20세 기 인류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75년 4월 30일은 사이공이 해방되는 날이었다. 그날 사이공에 있던 석천선생은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그만 탈출에 실 패를 하고 6년동안의 억류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억류생활을 하게 된 원인중 하나는 그당시 가지고 있던 재산 때문이었다. 꽤나 많은 재고 때문에 그냥 버리고 갈 수가 없었 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잘 될거라는 기대치가 강해서 차일 피일 하다 보니 시간을 놓쳤다. 
"75년 4월 28 에는 죽은줄만 알았던  다낭 공장에 있던 나의 한 국인 직원 7명이 사이공으로 피난을 오기위해 배를 타다가 수 많은 피난민 속에서 내가 송금하여준 3만불이 든 가방을 그만 바닷물속에 빠뜨리는 불상사를 당했다. 그중 한명이 물속으로 들어가 가방을 찾겠다는걸 모두 말려서 그냥 사이공으로 왔다 길래 잘했다고 위로 하여 주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지만 그걸 찾으려 물속에 들어갔으면 한 생명마저 잃을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75년 4월 29일 철수를 하기 위해서 탑승대기중 우 리 공관 원들과 교민의 철수를 돕다가 그만 미군의 철수작전 종료와 함께 마지막 헬리콥터를 놓쳐 버린것도 그 원인중 하 나가 되었다. 당시 삼환기업의 전동진 지사장과 문병학 부지사 장도 회사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귀국을 하지 않고 남아있었 다. 나중에 회사에서는 영웅 대접을 하여 주었다. 하여튼 재산 때문에 쉽게 탈출을 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사람이 꽤 있었다.
헬리콥터를 놓친 교민들은 이대용 공사의 지휘로 판딘풍가 53번 지에 있는 한국대사관저로 두려움을 안고 옮겨 갔으며 이때부 터 기약없는 억류생활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석천선생은 그 냥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교민 몇명과 함께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사이공 근처 해변가로 갔다. 그 러나 탈출구는 모두 잠겨 있었다. 그때 석천선생은 "본국으로 얼마전에 돌아 간 처자식의 생각에 앞이 캄캄했습니다"라고 술회 하였다.
석천선생 일행은 참담한 심정을 안고 다시 억류교민들이 있는 대사관저로 돌아왔다. 이날 상오 11시쯤 사이공 시내로 월맹군 이 들어왔다. 그들의 깃발을 단 탱크들이 대사관저 앞을 지나 갔다. 이를 본 교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오전내내 들리던 포소리와 총성은 월남이 항복한 점심시간 이후 부터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 교민들 일행은 이를 견디다 못해 근처에 있는  프 랑스 병원인 그랄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행이 버스를 구 할수 있어서 그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그랄병원(지금 금호아 시아나 건물 뒷쪽에 있는 아동병원) 앞뜰에서 공포와 함께 석천선생 일행은 밤을 꼬박 새웠다 한다.
다음날 베트콩 10여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10분내로 병원에서 철수 할것을 명령하였다. 일행은 다시 대사관저로 돌아왔다. 그날밤 재월 한인자치회를 조직 하였다. 외교관들이 입회하 고, 향후 교민들의 생사는 자치회에 맡기기로 합의 하였다. 교민 박제동씨의 추천에 의해 석천 선생이 만장일치로 회장에 뽑혔다. (1975.5.1) 부회장에는 유남성을 뽑았다. 그전에 공영 건설의 김인상씨가 교민회장을 할때 석천선생은 섭외및 지방 부장을 하였었다. 이때 월한양행의 곽영천부장은 기자출신으 로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원고를 작성하여 등사판으로 교민 소식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소식지를 김기태교수와 같이 배포 하였다한다.
회장에 뽑힌 석천선생은 "나 한사람 희생되더라도 우리 대사 관 직원 8명과 교민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 시요"라고 옆방에 들어가 간절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석천선생은 6년동안 의 억류생활중 교민회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어려운 상황도 많았지만 한점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 하였다는데에 무한한 자부심과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라고 회고 하였다.
1981년 5월28일 마지막 잔류교민으로서 일행 3명과 함께 사이 공을 출발하여 방콕으로 향하는 에어프랑스 747기에 올랐을 때 교민 170명중  최기선 1명만 남기고 (그도 곧 출국 시키겠다 는 확약을 받았다) 모두 월남을 떠날 수 있게 되었음을 하느님 께 감사를 드렸다고 덧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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