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협상을 잘 진행하고 이를 증명하는 계약서를 만드는 것에 익숙한 무역분야 베테랑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요구된다. 상황이 악화되면 이미 체결된 계약이라도 해지해야 한다. 

무조건 이미 체결된 조약이니 밀어붙여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는 회사를 위험으로 빠뜨린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에 손절, 즉 기존 계약이라도 파기하고 탈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오늘의 적절한 손절이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아이클릭아트

●계약해지 조항이 중요한 이유

국내 굴지의 무역상사인 A사. 최근 이 회사 식품사업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식품 자체에 다양한 리스크가 있고 거래금액 단위가 얼마 되지 않아 모두가 꺼리지만, 역설적으로 시황에 잘 맞춘 마케팅은 높은 수익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특히 K-식품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중소기업의 수출창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존에 국내에 없는 식자재를 수입하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양방향 수출입이 균형을 이루는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동남아에서 수입하는 바나나는 전통적인 수입 아이템이다. 

높은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넓은 수요층을 확보하여 대량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도 상사가 바나나 수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이 회사는 태국에서 바나나를 수입하면서 관행대로 ‘거래의 해지’라는 조항을 넣기로 했는데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누가 봐도 뻔한 내용을 계약서에 넣었기 때문이다. 

빼야 한다는 측은 내용이 장황하고 복잡하여 실효성이 없으면서 계약서만 길어진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반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계약서의 특성상 해당 조항 삽입은 당연하다는 입장이 맞섰다.

• 부도·파산 시 계약해지 조항(Termination for Insolvency or Bankruptcy)

Either Party may terminate this Contract immediately upon written notice to the other Party if the other Party:
(a) becomes insolvent or unable to pay its debts as they fall due;
(b) files for bankruptcy or is subject to any bankruptcy, insolvency, or similar proceedings;
(c) makes an assignment for the benefit of creditors; or
(d) has a receiver, trustee, or administrator appointed over its assets or business.
Such termination shall be without prejudice to any rights or remedies accrued prior to termination.

• 부도 또는 파산에 따른 계약 해지

일방 당사자는 상대방이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 서면 통지를 통해 즉시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a)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채무를 기한 내에 상환할 수 없는 경우
(b) 파산을 신청하거나 파산, 지급불능 또는 유사한 절차의 대상이 된 경우
(c) 채권자 이익을 위한 자산 양도를 한 경우

그러나 무역 베테랑들의 의견은 계약해지 조항은 중요하고도 절박한 내용이라고 강변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뻔히 돈을 못 줄 상황에 내몰려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수출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손해배상을 감당해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민법은 544조와 546조에서 당사자 중 일방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는 경우는 채무불이행으로 한정되어 있다. 

• 민법 제544조(이행지체와 해제) 당사자 일방이 그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때에는 상대방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그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하지 아니한 때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에 의하여 일정한 시일 내에 이행하지 아니하면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는 최고를 하지 아니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 민법 제546조 (정기행위와 해제) 당사자 일방이 정한 시기에 이행하지 아니한 때에는 상대방은 그 이행이 없으면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하여, 최고를 하지 아니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계약을 해지하는 법정해지권은 제한적인 경우에만 적용된다.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항이 아닌 경우 어음과 수표 등의 부도, 파산과 회사정리절차 개시신청, 압류, 가압류, 가처분, 계약상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불가항력이 일정 기간 지속되는 경우 등의 상황에서 일방이 계약을 해지하려고 하면 계약서상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약정해지권이라고 한다. 

따라서 약정해지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사항은 불필요한 사항이 아니다. 

누가 봐도 돈을 받을 확률이 거의 없는 경우라도 약정해지권 조항에 언급이 없으면 해당 계약을 해지할 수 없는 것이다. 

민법도 적용되지 않는 국제 거래라면 더욱 세심하게 계약서를 다듬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조항을 참조해도 좋을 듯하다.

If either Party fails to perform any of its obligations under this Contract, the non-breaching Party may give written notice requiring the breaching Party to remedy such failure within [X] days after receipt of such notice.
If the breaching Party fails to cure such breach within the specified period, the non-breaching Party may terminate this Contract by written notice with immediate effect.
Such termination shall be without prejudice to any rights or remedies accrued prior to termination.

(일방 당사자가 본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상대방은 서면으로 해당 위반의 시정을 요구하고, 그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X]일 이내에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위 기간 내에 위반이 시정되지 아니한 경우, 상대방은 서면 통지로써 즉시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본 해지는 해지 이전에 발생한 권리 또는 구제수단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최용민
최용민경제통상연구소장
광운대·숭실대 겸임교수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