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세기 베트남 현대사 후편 미국의 경제봉쇄와 ‘도이머이’ - 도이머이란 Đổi (바꾸다)와 Mới (새롭게)의 합성어로 ‘새롭게 개혁한다’는 의미임 - |
|
20세기 베트남 현대사는 한 마디로 미국과 서방의 철저한 경제봉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2 ~ 6차 경제개발계획, ‘도이머이’ 등과 같은 경제·정치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국가의 번영과 현대화를 추구해온 베트남인들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자존심 구긴 미국, 베트남 ‘경제원천봉쇄’ 도이머이 이전 시기 2차 5개년 계획 (1976 ~80) 3차 5개년 계획(1981 ~ 1985) 도이머이 정책 본격화: 1986년 이후 1992년 이후 - 개혁 가속화 #참 조 |
| 21세기 베트남 근·현대사 불멸의 애국전사 호찌민 |
|
베트남 역사는 한 마디로 외세 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로 정의할 수 있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저항했던 베트남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궤멸한 새로운 식민지배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중에서도 이번 호에 소개할 베트남 근·현대사는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 베트남의 60년 투쟁을 이끌었고,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최고 사령관 호찌민 (1890~1969)을 빼놓고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지난 호에 잠시 소개했던 대로 1945년 9월 호찌민은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세계열강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가 30년 전쟁에 휩싸이는 서곡이었다. 1946년, 전후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한 프랑스가 제일 먼저 식민 지배국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노이·하이퐁 등 대도시에 전면폭격을 감행했다. 당시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찌민은 단언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제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세계 전사에도 기록된 1954년 디엔 비엔 푸(Điện Biên Phủ)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프랑스가 무릎 꿇을 때까지 무려 7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1954 항불 전쟁 이후 한편 북베트남은 어땠을까. 호찌민의 영도 하에 꾸준히 전쟁 복구와 경제재건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남베트남을 대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협상도 수차례 제의했다. 그때마다 고딘디엠 정권은 거부했다. 이처럼 친미정권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하고, 줄기차게 북베트남과 연계 투쟁을 전개했다. 베트남 전쟁기 그러나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 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라고 화답했다. 놀랍게도 1968년부터 미국은 휘청거리기 시작했으며, 1973년경 전쟁은 마침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1975년, 베트남 통일 무기보다 강한 베트남 민중의 신념이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순간, 세계는 이 나라에 열광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으로 양심적이고 평화애호적인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전쟁은 유럽의 68 혁명에, 미국과 일본의 반전운동에, 남미의 변혁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성조기를 앞세우고 싸운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다는 미국 군대의 오만무도함은 베트남전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시 미국 군대는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편에 서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는 베트남 통일 후 미국의 경제보복, 베트남 도이머이 정책 등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는 베트남 현대사의 마지막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조회 수 |
|---|---|---|---|
| 162 |
호치민에 고급차가
| kimswed | 4778 |
| 161 |
캄보디아관문
| kimswed | 3935 |
| 160 |
메콩강변사람들
| kimswed | 3924 |
| 159 |
호치민거리
| kimswed | 4244 |
| 158 |
호치민루트
| kimswed | 4996 |
| 157 |
호치민사람들의 기질
| kimswed | 5494 |
| 156 |
낯선베트남풍경
| kimswed | 4560 |
| 155 |
베트남컨트리크럽
| kimswed | 3751 |
| 154 |
롱탄골프장
| kimswed | 3994 |
| 153 |
부창골프장
| kimswed | 3555 |
| 152 |
오션둔골골프장
| kimswed | 3530 |
| 151 |
송베골프장
| kimswed | 4245 |
| 150 |
파라다이스골프장
| kimswed | 4273 |
| 149 |
팔리스골프장
| kimswed | 3972 |
| » |
베트남근현대사
| kimswed | 3599 |
| 147 |
골프8
| kimswed | 3351 |
| 146 |
베트남의점심시간
| kimswed | 4786 |
| 145 |
참족의여인들
| kimswed | 4681 |
| 144 |
베트남어린이
| kimswed | 4270 |
| 143 |
베트남철도
| kimswed | 4284 |
| 142 |
골프7
| kimswed | 3627 |
| 141 |
골프6
| kimswed | 3633 |
| 140 |
골프5
| kimswed | 3425 |
| 139 |
골프4
| kimswed | 3203 |
| 138 |
골프3
| kimswed | 2980 |
| 137 |
골프2
| kimswed | 3165 |
| 136 |
골프1
| kimswed | 3240 |
| 135 |
달라진호치민
| kimswed | 3589 |
| 134 |
HEOMOI
| kimswed | 3515 |
| 133 |
금호아시아나빌딩호치민
| kimswed | 4868 |
| 132 |
베트남자라탕
| kimswed | 5464 |
| 131 |
까께오탕
| kimswed | 3837 |
| 130 |
프놈펜골프장
| kimswed | 9382 |
| 129 |
구찌터널
| kimswed | 3999 |
| 128 |
sealinks골프장
| kimswed | 3303 |
| 127 |
트윈도브스
| kimswed | 4273 |
| 126 |
호치민골프장
| kimswed | 5476 |
| 125 |
피닉스골프장
| kimswed | 4129 |
| 124 |
베트남역사11
| kimswed | 3559 |
| 123 |
베트남역사10
| kimswed | 3674 |



한편 1980년대 후반 동구와 소련시장의 붕괴 이후로 베트남의 국제무역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1986년 이전까지 베트남의 무역은 사회주의권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규모도 연간 10억 달러를 넘지 않았지만 1987년이래로 교역상대국이 다양화되었고, 수출액도 이후 급속하게 증대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1977년의 법을 대체하는 외국인투자법이 제정되어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투자지역이 되었다. 즉, 87년의 투자법은 합작기업에 대한 2년간의 세금유예, 특정 수출입품목에 대한 세금면제, 합작투자기업의 비국유화보장 등을 명시했으며, 모든 부문에 대한 기업활동이 허용되고 외국은행의 설립도 허용되었다. 외국인투자법의 제정은 이전까지 원조의 형태로 도입되던 외국자본을 투자프로젝트형식으로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부터는 100% 외국소유프로젝트를 허용하였다 .

1975년, 생전에 호찌민 (1969년 사망)이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쟁취했다. 4월 30일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며,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처럼 베트남 민중이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워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는 1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세계 현대사에서 이렇게 셋이나 되는 제국주의 나라와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한 예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