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풍습 고려말몽골공주초빙

kimswed 2007.01.18 08:08 조회 수 : 2516 추천: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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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5명의 왕이 7명의 몽골공주를 아내로

 

 

 

몽골은 고려를 세력권 안에 두고 고려는 평화를 보장받는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대부분의 결혼 생활이 불행… 원 황실에 편지 보내 고려왕 폐위시키기도

‘단일민족’이 강조되던 한국에서도 이제 국제결혼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작년 한국인의 총 결혼 건수 31만6375건 가운데 국제결혼이 13.6%인 4만3121건에 달했다. 이는 전년보다 21.8%가 늘어난 수치로 국민 8명 중 1명이 외국인 배우자를 맞고 있는 셈이다.
 

역사 기록에서도 국제결혼은 발견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은 고구려 유리왕(?~18)이 중국여인 치희(雉姬)를 계비(繼妃)로 맞아들인 일일 것이다. 김해 김씨 시조인 김수로왕(?~199)도 인도여인 허황옥(許黃玉)을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려말 ‘충’자 돌림 왕들의 시대처럼 외국 여인을 지속적으로 왕비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고려 25대 임금 충렬왕(재위 1274~1308)부터 31대 임금 공민왕(재위 1351~1374)까지 약 100년간 고려의 왕들은 모두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 기간 동안 5명의 고려 왕이 7명의 공주를 포함해서 8명의 몽골여인과 결혼했다. 충선왕은 두 명, 충숙왕은 세 명의 몽골여인과 결혼했다.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이 혼인을 맺은 것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무후무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몽골(원)은 치열한 항쟁을 펼쳤던 고려를 혼인관계를 통해 세력권 안에 묶어놓으려 했고 고려는 몽골제국의 우산 아래서 평화를 누리고자 했다.

▲ 그림·안영태

1274년 음력 5월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열여섯 살, 신랑은 신부보다 스물세 살이 많은 서른아홉 살의 유부남이었다. 신부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로 원 황제 쿠빌라이의 딸이었다. 고려 원종의 장남인 고려세자 왕심(王諶)은 그녀와 혼례를 치르고 두 달 뒤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황제의 사위(부마)라는 신분 덕분에 원 황실의 서열에서 7번째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고려에 시집 온 첫 몽골공주인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 매우 민감했다. 고려시대 학자 이제현에 따르면 “제국대장(홀도로게리미실) 공주는 성격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에게 과오가 있으면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 충렬왕에게도 욕을 퍼붓고 심지어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홀도로게리미실 공주는 진심으로 고려의 장래를 걱정한 왕비였다. 충렬왕은 사냥을 핑계로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매일 밤 풍악을 울리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홀도로게리미실 공주는 그런 충렬왕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사냥하는 것만 일삼으니 나라 일은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음악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은 충렬왕과 홀도로게리미실 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이었다. 그는 쿠빌라이 황제의 외손자라는 배경을 가지고 몽골 황실에서도 세력을 떨쳤다. 황실의 어른들은 그에게 ‘익지례보화(이지르부카)’라는 몽골 이름을 지어주었다. 몽골어로 ‘젊은 황소’라는 뜻이다. 그는 1296년 11월 진왕 카말라의 딸인 보탑실련 공주와 혼인했다. 진왕 카말라는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성종 테무르의 큰 형으로 원 황실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충선왕과 보탑실련 공주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왕이 공주와 결혼한 뒤로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빈첩(嬪妾)이 간혹 왕에게 몸을 바치면 임신하기도 하니 공주가 질투하고 저주하는 틈이 생겼다.”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처럼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보탑실련 공주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보탑실련 공주는 원 황실에 편지를 보내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결국 충선왕은 즉위 8개월 만에 폐위되고 말았다. 공주의 힘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성종 황제가 죽은 뒤 무종(武宗) 황제를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우자 상황은 달라졌다.

 

보탑실련 공주도 황제 옹립에 공을 세운 충선왕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했다. ‘질투의 여인’ 보탑실련 공주는 1315년 12월 한을 품은 채 원나라에서 사망했다. 남편 충선왕과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충숙왕(재위 1313~1330, 1332~1339)에게 시집 온 세 명의 몽골 공주는 더욱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충숙왕은 충선왕과 몽골여인 야속진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이었다. 야속진은 몽골 공주 출신은 아니었다.

 

충숙왕의 첫 몽골여인이었던 역련진팔라 공주는 매맞는 아내였다. 충숙왕은 걸핏하면 공주를 때렸고 코피를 나게 한 적도 있었다. 충숙왕은 고려인 아내 덕비(명덕태후)를 사랑했다. 역련진팔라는 1319년 갑자기 사망했는데 궁녀와 궁중 요리사의 증언에 따르면 충숙왕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다음은 ‘고려사’의 기록이다. ‘왕이 몰래 덕비와 연경궁에서 동침하였는데 공주가 질투하다가 왕에게 구타를 당하여 코피가 났다.’

 

충숙왕의 두 번째 몽골여인인 금동공주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 충숙왕은 만삭이었던 그녀를 지금의 서울 용산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용산원자)를 낳게 했다.

 

세 번째 부인 백안홀도 공주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재위 1330~1332, 1339~1344)에게 겁탈을 당했다. 충숙왕이 죽은 뒤 충혜왕은 백안홀도 공주를 초청해 여러 차례 잔치를 열었다. 공주가 답례로 충혜왕에게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충혜왕은 잔치가 끝났는데도 술 취한 체하며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공주의 침실로 들어갔다.

 

공주가 깜짝 놀라 일어나자 충혜왕은 몇 사람에게 시켜 공주를 꼼짝 못하도록 붙잡게 한 뒤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겁탈했다. 백안홀도는 충혜왕에게 어머니 격인 여자였지만 충혜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충혜왕의 부인 역련진반 공주 역시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고려의 몇몇 신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고려인 남편의 사랑을 받은 공주는 공민왕의 아내인 보탑실리(노국공주)가 유일하다. 몽골공주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녀는 공민왕과 깊은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공민왕의 사랑은 고려라는 나라에는 ‘독약’이었다. 보탑실리 공주가 아이를 낳다 죽자 공민왕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공민왕은 공주를 그리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한 남자로서 아내에 대한 사랑은 감동스럽지만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기리는 토목공사를 벌이고 아들을 낳기 위해 자제위(子弟衛ㆍ국왕의 신변에 대한 호위 겸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설치한 관청)의 미소년들을 시켜 후궁들을 겁탈하도록 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공민왕은 내시 최만생 등에게 암살됐다. 이는 고려의 몰락을 의미했다. 역사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에 시집온 몽골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았다. 고려 왕들은 낯선 땅으로 시집온 이국(異國)의 아내에 대해 사랑과 배려를 하지 않았다.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남녀의 국제결혼이라면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더욱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이한수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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