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4

kimswed 2009.05.03 03:25 조회 수 : 3182 추천: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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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수 없는 친구

일반적으로 한평생 살면서 자신이 굳게 믿을 만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사실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믿는다는 것도 다 개인적으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믿을 만한 친구란 적어도 자기 편에 항상 서있는다는 확신이 서는 친구를 말함이 아닐까?
그런데 자기 편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류작가 공지영의 책 중에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라는 책이 있다. 자신의 딸래미에게 보내는 사랑의 사인을 책 한 권에 넘치도록 담았다. 아마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다 자신이 하는 일을 아니다 하며 부인해도 그 친구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나에게 등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즉 절대로 배신 때리지 않을 사람을 말한다. 

필자에게는 몇 명의 그런 친구가 있다. 아주 많이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친구란 동성의 동년배라는 조건은 물론이고, 반드시 인간이라는 한계 역시 초월한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 많을 것이다. 집에 있는 강아지를 친구로 삼는다면 절대로 배신을 맛보는 기회는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이기심과 변덕, 그리고 다른 생명을 먹이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잔인함과 동시에 위장된 나약함을 깨닫고 있는 이들은 친구로 반드시 인간이라는 조건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친구라는 개념의 경계선을 이성, 나이, 인간, 생명체라는 조건마저 다 담아 안도록 경계를 넓힌다면 필자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골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얘기이긴 한데 예전에 우리들의 국민가수 조용필이 모 국회의원 여식과 결혼이 어긋나 이혼을 할 당시 어떻게 마음을 달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나에게는 골프가 있어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는 답변을 한 기억이 난다. 당시 그에게 골프는 그의 마음을 위로하는 최상의 친구였던 게다. 그 후에 어느 국내 골프장에서 앞 조에서 즐거운 듯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플레이를 하는 조용필을 본 적이 있다. 골프가 그의 친구라는 것이 진실이었다.


필자에게도 골프 역시 아주 가까운 친구다. 일 외에는 별다른 소일거리가 없는 필자에게는 골프란 베트남에서 만난 지인들과 어울릴 기회를 제공하고 지루한 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벗어나게 해주는 귀한 친구다.
그러나 믿음을 기준으로 저울질을 한다면 글쎄, 골프라는 친구는 믿을 만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제 돌변할 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펴야 하는 까다로운 친구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는 참 냉정한 친구다. 자신에게 쏟는 관심이 조그만 덜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내친다. 이 친구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안보면 멀어진다는 현실적 논리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친구다.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해도 몇 개월만 소식이 없다가 다시 찾으면 반가워하기는커녕 사정없이 곤두박질 치도록 만들고 그 절망과 실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 확인시키는 아주 이기적인 친구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양반이다. 이제는 확실히 친해졌다고 마음을 놓고 조금만 오만한 기색을 보이면 그 역시 어김없이 토라져 응징의 칼을 들이대며 속을 확 뒤집어 놓는다. 
잘못했다고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가끔 용서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평생을 다시 살피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991년 59타를 기록하고 기록의 사나이로 불렸던 칩백은 다음해 마스터스 마지막 라운드에서 파 5홀을 직접 공략하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갔다는 이유로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은 뒤 아예 골프 선수로써의 재능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 다음해 취득한 상금이 고작 1300불이었다고 하니 참 골프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골프라는 친구는 이렇게 자신의 친구를 절망의 구덩이에 빠트리고 난 후에도 일언반구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브리티시 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나카지마 벙커에 빠져 4타를 소비한 데이빗 듀발은 아직도 그 벙커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 컷 오프를 밥 먹듯 반복한다.

지난 주 우리에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또 일어났다. 한국인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골프 지존 신지애가 싱글 스코어, 그것도 남자들은 인정해주지도 않는 9타를 오버한 싱글 스코어를 금년도 LPGA개막경기인 SBS OPEN 에서 기록하여 컷 오프 되는 수모를 당했다. 신지애가 그날 기록한 81타라는 스코어는 그녀가 프로에 입문하고 나서 처음 기록하는 80대 타수이고 처음 당하는 컷 오프였다고 한다.

아마 이 사건에 대하여 그 원인을 정신과 의사에게 묻는다면 분명히 지난친 의식이 샷을 망쳤으니 의식하지 말고 믿고 쳐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골프의 속성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간의 심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어느 책에서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믿음의 부족에서 나온다며 그 예로 밥을 먹을 때 수저로 음식물을 들고 입에 넣는 일을 실패하고 코에 넣은 적이 있는가 묻는다. 물론 중풍환자가 아닌 이상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의식하며 먹으면 입에 넣기가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것을 그 증명이라고 들이댄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손이 하는 일이라 해도 포크와 골프채를 같은 경우로 비유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스폰서를 맺는 조인식에서 그 원인을 정확히 밝혔다. 그녀는 준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겸손함이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LPGA 를 뛰고 보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오만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는 말이다. 이 번 사건을 쓴 보약으로 삼고 다시 준비하고 겸손하게 임하겠다고 담담히 밝혔다. 신지애라는 어린 선수가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다. 골프가 자신의 오만함을 읽고 내려친 채찍을 그대로 감수하며 골프가 원하는 정답을 내놓은 것이다.

신지애의 9 오버파 라는 스코어는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던져준다. 한가지는 골프라는 친구의 매몰찬 진면목이고 또 한가지는 우리 스스로 위로 받을 수 있는 변명거리다. 골프 지존이라는 신지애도 9 오버파를 치는데 내가 90개를 쳤다고 뭐 그리 슬픈 일이냐는 거다.

요즘 골프를 접을까 생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심찮게 연습을 하고 있음에도 골프스코어는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곤두박질을 계속한다.
지난 주에는 라운드 내내 허덕대다 어느 홀에서 오비도 내지 않고 트리플 보기(3오버)를 기록한 홀에서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마침 들고 온 애궂은 우산을 갈갈이 찢어버리듯 작살을 내고도 화가 안 풀려,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 자신의 양 뺨을 사정없이 때려댔다.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의 결과, 입안이 터졌는지 피 맛으로 좀 찝찔하고, 얼굴은 얼얼하긴 하지만 덕분에 기분은 좀 풀렸다.
그리곤 아무 일이 없는 양 억지 웃음을 지으며 다음 티 박스에 올라 다시 티샷을 날렸다. 한결 나아진 기분이다. (동반자여 용서하라.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걸, 화장실에서 난리 친 것, 눈치 못 챘지? 헤헤)

애당초 골프라는 몰인정한 녀석을 친구로 삼은 게 잘못이다. 이미 20년이나 사귄 친구와 절교를 선언할 수도 없고 어차피 평생을 함께 가야 하는데, 참 앞날이 갑갑하다. 또 얼마나 많은 우산이 부서지고 얼굴이 난타 당해야 될지 모르겠다.
암튼 당분간 자성의 시간을 보내며 20년 지기의 속내를 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